항목 ID | GC088006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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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濬根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60년 12월 18일 - 유준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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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5월 - 유준근 홍주의병 홍주성 전투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8월 5일 - 유준근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유준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홍주의병|3·1운동 참가 |
[정의]
일제 강점기 시기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출신의 의병.
[개설]
유준근(柳濬根)[1860~1920]은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서울에서 3·1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유준근은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대마도에 유폐되었던 ‘홍주 9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조약 반대 투쟁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대한제국 시 중기 의병[1904~1907]이 일어나 치열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홍주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한 중기 의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이 치열했던 의진이었다. 1906년 3월에 민종식(閔宗植)[1861~1917]을 비롯하여 이용규(李容珪)[1859~?], 이세영(李世永)[1869~1938] 등은 청양군 정산(定山)을 거점으로 삼고 준비를 마무리한 뒤 5월 홍산(鴻山) 지치(芝峙)[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의병은 서천, 남포 등지를 거쳐 5월 19일 일시에 공격을 가해 홍주성을 장악하고 기세를 떨쳤다. 유준근은 민종식 의진이 남포를 지날 때 찾아가 합류하였다. 의진이 4일간 남포에 머무는 동안 서로 구국 전략을 논의하였으며, 민종식의 초청을 받아 병중임에도 종군하였다.
[홍주성 의병 전투]
홍주의병이 홍주성 장악 후 편제를 갖출 때 유준근은 유병장(儒兵將)에 임명되었다. 성을 점령한 뒤에도 홍주의병은 전력 확충을 위해 군사들을 모으는 한편, 적의 대공세에 대비하여 편제를 새롭게 정하였는데, 이때 유준근은 윤상봉(尹相鳳)·채광묵(蔡光默)·이상두(李相斗)와 함께 참모(參謀)에 임명되었다.
홍주의병이 기세를 떨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는 서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출동시켜 의병 탄압 작전에 들어갔다. 통감으로부터 군대 출동 지시를 받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사령관은 1906년 5월 27일 서울에서 보병 2개 중대를 홍주로 급파한 것을 비롯하여 경성 헌병대대에서도 대위 이하 26명을 급파하였고, 전주 수비대에서도 1개 소대 병력을 차출하여 홍주로 파견하였다. 이렇게 집결한 일본군은 5월 31일 새벽 홍주성을 급습하였다.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 정예부대의 공세로 인해 홍주성은 함락되고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안항식(安恒植)[1860~1922]은 홍주성 전투 때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82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안항식은 일본군 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은 뒤 7월에 무기형을 선고받고, 홍주의병의 중심 인물인 최상집(崔相集)·이상두(李相斗)·안항식(安恒植)·신보균(申輔均)·유준근(柳濬根)·남규진(南奎振)·이칙(李祀)·문석환(文奭煥)·신현두(申鉉斗)와 함께 ‘홍주 9의사’의 한 사람으로 1906년 8월 8일 대마도로 끌려가 감금되었다.
그 직후에는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7]과 그의 참모였던 임병찬(林炳瓚)[1851~1916]도 끌려와 함께 옥고를 겪었다. 유준근은 일본군 12사단 예하 대마경비보병대대병영 안에 신축된 감금소에 갇혀 2년 6개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1909년 2월 이칙, 이상두와 함께 석방되었다.
[3.1운동의 참여]
유준근은 1909년 2월 석방 이후 향리에 은둔해 있었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독립운동에 나섰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올라가 백관형(白觀亨)·송주헌(宋柱憲) 등 10여 명과 함께 서울 수창동(壽昌洞) 여관에 회합을 가지고, 순종을 복위시켜 민심을 수렴하고 독립을 성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강산도 전과 같고, 궁실도 전과 같고, 인민도 전과 같으니, 다시 황제의 위에 좌정하여 일국을 호령하고 각국에 통보하시라.”라는 내용의 글을 청량리에서 순종(純宗)[1874~1926]에게 올리려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1919년 11월에 6월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파리강화회의의 독립청원서 서명]
유준근은 유림 대표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파리장서] 서명자 137명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때 호남지방 책임을 맡았던 유준근은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이번 독립선언이 이미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나 그 선언서 연명에 우리 유림이 한 사람도 참가치 못했다는 것은 천고에 있을 수 없는 수치가 아닙니까? 이 치욕을 씻기 위해 전국을 망라한 대유림단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유림단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의 국제 승인을 요청하려는 계획이 비밀리에 준비 중에 있으므로 선생의 지도를 간청합니다.” 라고 설득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