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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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未義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을경 |
[정의]
1907년에 충청남도 보령시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개설]
정미의병(丁未義兵)은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시기인 정미년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전쟁이다.
[역사적 배경]
정미의병은 유생과 농민, 해산된 군인뿐만 아니라 노동자, 상인, 교사와 학생 등 전 계층이 참여한 구국 전쟁으로 발전한 특성을 갖는다. 항일의병전쟁이 확산되자 의병 간의 연합전선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각지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은 ‘13도창의대진소’라는 연합의병대를 결성하여 서울 탈환 작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정미의병 시기 활동하였던 보령 출신 의병]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은 10여 명 정도 확인된다. 김석원(金錫元)[1862~?], 김화식(金華植)[1866~1943], 백관형(白觀亨)[1861~1928], 백만기(白萬己)[1883~1961], 오경춘(吳敬春)[1874~?], 유준근(柳濬根)[1860~1920], 윤창영(尹昌榮)[1889~1988], 이규상(李奎相)[1883~?], 황영수(黃英秀)[1855~1919], 황재현(黃載顯)[1848~1903] 등이 있는데, 여기서 정미의병에 활동한 의병은 김석원, 백만기, 윤창영, 오경춘, 이규상 등이다.
김석원은 1907년 11월부터 1908년 3월까지 충청남도 일대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이라는 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백만기는 1908년 3월 지석홍 의병대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일대 특히 남포, 풍년동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후 이종갑(李鍾甲)[1874~1932], 윤창영 등과 함께 남포군 불은면에서 금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오경춘은 1908년에 충청남도 보령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규상은 1909년 4월 23일 충청남도 일대 특히 홍성의 송지곡면 금곡리에서 오양선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보령 출신 의병들은 정미의병에 가담하여 활동한 점이 많이 확인된다.
[결과]
의병의 끈질긴 항쟁이 계속되자 일본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 및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화승총이 주요 무기였던 의병들은 근대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당해 내지 못하였다. 결국 수만 명의 의병들은 일본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일본은 의병의 근거지가 될 만한 촌락과 가옥을 닥치는 대로 방화하고 민간인을 살육하여 조선을 초토화시켰다. 일본의 만행으로 인하여 의병의 활동은 국내에서 크게 위축되었으며, 살아남은 의병들은 산속 깊숙한 곳에 은거하거나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대일 항전을 지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 해산으로 격렬해진 정미의병은 의병의 활동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전 국민이 참여한 구국 전쟁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기존의 의병들이 분산적으로 활동하였던 점과 달리 정미의병에서는 연합전선 형태로 체계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