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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233
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천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9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기도 부천 문학면 관교리
관련인물/단체 이보경|이무경|최선택|이창범|이재경|이상태|최개성|심혁성|송성용|송윤중|오창조|김춘근|윤영택|박중일|조명원|조중서|최봉학|문무현|윤치방|김윤배|윤뵌|유웅렬|구길서|오기섭|김윤규|노병상|홍원표|권도일|임용우|이재관|차경창|혈성단|명덕학교|합일사숙

[정의]

1919년 3월 23일부터 4월 9일까지 경기도 부천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만세운동.

[개설]

일제식민지에 항거한 전 민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부천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23일 이보경 등을 주축으로 문학면 관교리에서 횃불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용유면 남북리·계양면·장기리·오류리, 계남면 중리·동양리 지역의 운동을 거쳐 4월 9일 덕적면 진리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뒤 한민족은 무단 통치 아래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교육과 종교도 탄압받았다. 한편 회사령으로 민족 자본가의 성장이 막히고,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도시의 노동자 또한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크게 차별을 받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거세어져 갔고, 다양한 형태의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일본인들이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민중들이 분노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였고,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이에 힘입어 거국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다. 때마침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식민지 처리 과정에서 식민지 국가에 민족 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이 주장은 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 해방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도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 공원에서는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대열을 이루었으며, 시위의 맹렬한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경과]

부천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23일에 이보경(李輔卿)·이무경(李武卿)·최선택(崔善澤)·이창범(李昌範)·이재경(李載卿)·이상태(李相台)·최개성(崔開城)의 주동으로 문학면 관교리에서 횃불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조명원(趙明元)이 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奉學)·문무현(文武鉉) 등과 협의하여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였다. 태극기와 격문 80매를 제작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150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 전개하였다.

같은 날 계양면에서는 100여 명이 만세 시위운동을 펼치면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장기리에서는 600여 명이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25일에는 300여 명의 농민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26일에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동양리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28일에는 150여 명의 주민들이 오류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고, 31일에는 남동면 서창리에서 송성용(宋聖用)·송윤중(宋潤中)·오창조(吳昌祖)·김춘근(金春根)·윤영택(尹永澤)·박중일(朴中一)이 주축이 되어 4월 1일 질천(蛭川)시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한편 같은 날 대부면 동리에서는 김윤규(金允圭)·노병상(盧秉相)·홍원표(洪元杓)·권도일(權道一) 등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다음 달인 4월 6일과 7일에 걸쳐 영흥면에서는 50~10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4월 9일에 사립 명덕학교 교사인 임용우(林容雨)가 학교 운동회를 기회로 서당교사 이재관(李載寬), 합일사숙 교사 차경창(車敬昌) 등과 함께 동리 주민들과 합세하여 덕적면 진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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