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1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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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明元 |
영어음역 | Jo Myeongw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추교찬 |
[정의]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부천군 용유면 남북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남북동]에 살던 조명원은 1919년 3월 23일과 3월 24일 동네 청년 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奉學)·문무현(文武鉉)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3월 28일을 거사일로 잡고 참여를 촉구하는 격문을 남북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남북동]·거잠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덕교동]·을왕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을왕동]·덕교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덕교동]에 배포하였다.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광장에서 동리 주민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중앙에 세우고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주동자로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2일 제1심에서 조명원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 외에 조종서는 징역 1년 8개월, 문무현·최봉학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 항소심에서 조명원은 1년 6개월, 조종서·문무현·최봉학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조명원 등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