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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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榮泰 |
영어음역 | Byeon Yeongtae |
이칭/별칭 | 일석(逸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일제강점기 활동한 부천 지역 출신의 정치인이자 영문학자.
[활동사항]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는 일석(逸石)이다. 아버지 변정상(卞鼎相)과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 사이의 3남 4녀 중 다섯째로, 형은 변영만이고 동생은 변영로이다. 4세 때부터 재동소학교(齋洞小學校)에 입학하여 천자문을 배웠고, 12세에 부인 채씨와 혼인하였다. 부인 채씨가 51세로 사망하여, 이영민과 재혼하였고,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재동소학교를 졸업하고 교동고등소학교(校洞高等小學校)를 거쳐 계산보통학교(桂山普通學校)로 전학, 15살에 고등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애국지사이며 목사인 전덕기(全德基)의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나가면서 이회영(李會榮)의 지도를 받았다. 이회영이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해 가자19세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16년 북경 부근에 있는 협화대학(協和大學)에서 1년을 수료하였으며, 신흥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고국에 돌아와 1943년까지 24년 동안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서 영어 교사로 봉직하였다. 이후 부천의 농장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의원(民主議院) 접흡단비서처(接洽團祕書處)에서 영어 비서로 잠시 근무하다가, 다시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9년에는 대통령 특사로 필리핀에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필리핀 정부의 한국 정부 승인, 상주 외교 사절의 교환, 지역 협력 체제 구축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에는 국제연합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 회의에 참석하였고,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제3대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52년부터 1953년까지는 국제연합 수석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1953년에 국무총리와 외무부장관직을 겸임하였다.
1954년에는 제네바 정치협상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14개항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제네바 본회의에서 발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말로 발언을 시작했으며, 이는 국제회의에서 한국어가 회의 용어로 사용된 첫 순간이었다. 이 회의에서 북한은 유엔의 감시 하에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 대한민국은 헌법 절차에 따라 선거를 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1956년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고,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를 조직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변영태는 규칙적인 생활과 아령 운동으로 건강 관리를 하였고 공·사적인 생활이 청빈하였다.
변영만(卞榮晩)·변영로(卞榮魯)와 함께 이들 세 형제는 일세의 기재(奇才)로서 옛 중국의 당송팔대가이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에 비겨 ‘한국의 삼소(三蘇)’로 불리었다. 묘소는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 6307번지 밀양변씨 선산에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1925년에 『My Attitude toward Ancestor Worship』을 출간하였다. 1946년에는 『Tales from Korea』를 출간하였다. 1948년에는 『Song from Korea』를, 1949년에는 『Korea My Country』를, 1956년에는 자유출판사에서 『나의 조국』을 출간하였으며, 1959년 한국일보사에서 『외교여록』을 출간하였다. 1962년에는 민중서관에서 『논어』 영역본을 출간하였다.
기고문으로는 1961년에 「당면문제를 말한다」를 『최고회의보』 제2호에, 1965년 8월에는 「제네바 정치회담을 회고한다: 20년의 영광과 비애, 1953년」을 『신동아』 제12호에, 1965년 4월에는 「반성할 자는 누구냐」를 『신동아』 제8호에, 1963년에는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을 『신세계』 제2권 제9호에, 1963년에는 「민주주의의 현대적 이념」을 『체신문화』 제82호에 각각 실었다. 또한 『서울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을 통해 이승만의 정치 노선을 지지하는 글을 많이 기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