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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89
한자 昌原邑城
영어의미역 Changwoneup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동|중동|소답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읍성
건립시기/연도 1477년연표보기
높이 3.84m
둘레 약 1.34km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북동|중동|소답동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동에 있는 조선 전기 창원도호부의 치소(治所) 외곽을 옹위하던 성.

[개설]

세조창원읍성을 쌓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창원은 절제사 군영과 아주 가깝고 절제사 군영의 성곽이 넓기 때문에 따로 읍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창원의 경우 당시 군자감 창고는 군영의 성곽 안에 있었으나 의창은 부에 있었으므로 군영의 성곽 안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 후 창원읍성은 1476년(성종 7)부터 쌓게 되었고, 1477년 10월에 읍성을 완공했는데, 높이가 12척 7촌이고, 둘레가 4,410척이었다.

이로부터 170여 년 후인 1649년(효종 1) 10월에는 창원읍성을 개축(改築)하였다. 이 상황을 『창원부읍지(昌原府邑誌)』에서는, 돌로 쌓은 석축이었고 둘레는 2004척, 곡성(曲城)이 18곳, 옹성(甕城)이 4곳, 여첩(女堞)이 600곳이었으며, 남문의 이름은 진남루(鎭南樓), 동문은 향양루(向陽樓), 서문은 망미루(望美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고 각 루의 이름을 처음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북수문(北水門) 안에는 우물 두 곳과 못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1621년(광해군 13) 4월에 부사 금변(琴忭)이 쌓았다고 하였다.

창원읍성은 본 고을에 살고 있는 백성으로 하여금 쌓게 했는데, 주민들에게 고역과 부담이 많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창원부 병마절제사의 군영이 있는 성은 합포에 있었는데, 합포의 성을 쌓는 일은 1430년(세종 12) 연말에 진행되었다. 바다 어귀에서 4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588보이며, 절제사군영의 성은 둘레가 3,775자, 높이가 12자 6치, 성가퀴의 높이가 1자 8치이며 적대는 12개였다. 성문은 4개인데 옹성이 있으며, 성가퀴는 635개이고 해자의 둘레는 4,060자이며, 성안에 우물 7개가 있었다.

[건립경위]

조선의 건국 이후에도 변경 지역을 넘나드는 왜구의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해안변에 있었던 창원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창원 주변부의 왜구 문제는 항존하는 우려 사항이었으며, 그에 비례하여 효과적인 방어책의 일환으로 1410년(태종 10)에는 창원부염산성(簾山城)을 수축하였다. 그리고 염산성을 필두로 1430년 연말에는 합포의 성을 쌓는 일이 진행되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창원읍성의 축성 문제에 대한 의견이 세조 때 등장하였다.

[위치]

창원시 의창동에 속한 북동중동소답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천주산구룡산 하단부에 해당한다.

[현황]

창원읍성창원초등학교 신축과 도시화 개발 과정에서 심하게 훼손되었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현재 가장 잘 원형이 남아 있는 449-1번지 부분의 성벽을 따라 주택 사이사이에 있는 성의 기단부를 따라 남문지까지는 성벽의 상부는 결실되었지만 성벽의 기단부 1단 정도는 잔존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성벽 주변이 미나리 재배지와 논으로 사용되었고, 물이 흘렀다고 한다. 이 범위는 성벽에서 밖으로 약 10m 정도인데, 읍성의 해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지와 남문지는 둥글게 돌아가는 옹성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하고, 60~70년 전에는 남문지와 서문지 부분도 일부 남아 있었으나 그 이후 건물들이 신축되면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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