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0380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정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408년 - 의창현과 회원현 통합, 창원부 개설
개칭 시기/일시 1415년 - 창원부에서 창원 도호부로 개칭
승격 시기/일시 1601년 - 창원 도호부에서 창원 대도호부로 승격

[정의]

조선 왕조 시기 경상남도 창원 지역의 역사.

[개설]

창원은 본래 굴자군(屈自郡)인데 신라 경덕왕의안군(義安郡)로 고쳤고, 지금의 마산 지역인 회원현(會原縣)은 본래 골포현(骨浦縣)인데 경덕왕합포(合浦)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1018년(현종 9) 두 현을 모두 금주(金州) 관하에 붙였다가 뒤에 각기 감무(監務)를 두었고, 1282년(충렬왕 8) 의안을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회원현으로 승격하고 현령을 두었다.

[변천]

1392년 개국한 조선 왕조는 건국 이후 각종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으며, 태종 대를 전후한 15세기에 본격적인 정비 작업을 실시하였다. 지방은 군현 제도를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1. 조선 전기

1408년(태종 8) 7월 처음으로 의창현회원현을 합하여 창원부(昌原府)를 개설하고 종5품의 판관(判官)을 파견하고 경상 우병영(慶尙右兵營)을 설치하였다. 1415년(태종 15) 창원 도호부(昌原都護府)로 개칭하였으며, 1601년(선조 34) 창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군현의 치폐가 시기적으로 변동이 있었는데, 창원 도호부 관할은 1군 5현, 즉 함안군과 거제현·고성현·칠원현·진해현·웅천현이었다. 창원 도호부의 행정 조직은 면(面)과 그 아래 방(坊) 대신 운(運)을 사용하고 그 아래에 리(里)로 구성되었다. 즉 ‘부(府)-면-운-리’의 체계이다.

당시 5개의 면이 있었는데 동면(東面)은 지금의 창원시 동읍과 창원시의 일부, 서면(西面)은 마산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남면(南面)과 부내면(府內面)은 지금의 창원시 중심부, 북면(北面)은 창원시 북면에 해당한다. 각 면에는 권농관(勸農官), 운(運)에는 운장(運長)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진해현(鎭海縣)은 동면·서면·북면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종6품의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진해현은 1018년(현종 9)에 진주에 예속되었다가 1601년(선조 34)는 함안군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1617년(광해군 6) 진해현을 설치하면서 독립되었으나, 1627년(인조 5)에는 창원에 합쳐졌으며 2년 뒤인 1629년(인조 7)에는 창원에서 분리되어 함안군에 소속되었다. 1639년(인조 17)에는 주민들의 소청에 따라 다시 진해현으로 독립하였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08년(순종 2) 8월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한편 지금의 웅동(熊洞)에 해당하는 웅천현(熊川縣)은 동면·서면·상서면(上西面)·중면(中面) 등 4개 면으로 이루어졌으며, 현감이 파견되었다. 웅천현(熊川縣)웅지현(熊只縣)이었는데 웅신현(熊神縣)으로 고쳤으며 웅천현으로도 칭하였다. 웅신현(熊神縣)은 1437년(세종 19)에 수군 첨절제사를 두고 ‘웅지(熊只)’라고도 하였으며, 1452년(문종 2)에 웅신·완포(莞浦)의 두현과 천읍부곡(川邑部曲)을 통합하여 웅천현(熊川縣)으로 승격함과 아울러 김해 도호부에서 분립하였다.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을 평정한 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곧 현이 되었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에는 웅천군이 되었으며, 1908년(순종 2)에 창원군 관할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변경 지역을 넘나드는 왜구의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해안과 접하여 있던 창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1410년(태종 10) 왜구 방어책의 하나로 창원부염산성(簾山城)을 수축하였고, 1430년(세종 12) 연말에는 합포에 성을 쌓는 일이 진행되었다. 합포에는 창원부 병마 절제사 군영이 있었다. 1476년(성종 7)에는 창원읍성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477년 10월 완공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웅천읍성(熊川邑城)을 축성하였다. 세조 때 진관 체제(鎭管體制)가 시행되면서 웅천(熊川)은 김해진관(金海鎭管) 소속이었으며, 종6품의 병마 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가 지휘하였고, 제포진(薺浦鎭)에는 경상우도 수군 첨절제사영(慶尙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었다.

2. 조선 중기

축성을 통한 방어 대책 마련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왜인들은 옷을 바꾸고 말씨를 바꾸어 여러 고을로 횡행하였고, 변장을 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1510년(중종 5)에는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삼포 왜란을 일으켰다. 그 동안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272명이 살해되었고, 796구(區)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삼포 중 왜인들의 거점이었던 내이포[제포]와 인근 창원부의 주민들은 이 폭동의 중심부에 처해 있었다.

해소되지 않았던 왜인들에 대한 문제는 급기야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침입하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중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동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창원 지역을 내습한 일본군은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휘하의 병력으로 김해와 창원 및 진주를 공략하였다. 임진왜란 때 창원 지역의 항전 사례들은 노현(露峴) 전투창원성 전투, 의병장 최강(崔堈)이 분전한 안민 고개 전투, 합포(合浦) 해전안골포(安骨浦) 해전 그리고 웅포(熊浦) 해전 등을 들 수 있다.

왜구 문제는 시기적으로 평온한 적도 있었으나, 삼포 왜란 등을 거치며 거의 임진왜란까지를 관통하고 있었다. 왜인과 왜구들로 인해 지속적으로 겪어야 했던 지역 주민들의 부담과 고통은 본능적으로 그들에 대한 방어 심리와 저항 의식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화된 전쟁의 비극과 참상 속에서도 지역 주민 가운데 임진왜란 때 한 사람도 왜적에게 항복한 사람이 없었음은 경험을 통하여 축적된 왜구에 대한 저항 정신과 적개심을 잘 말해 준다. 1601년(선조 34) 이루어진 창원 대도호부로의 승격에도 이러한 사실이 반영되었다.

3.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이후 두 차례에 걸친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벌열 정치가 전개되고 붕당이 지속되었다. 중앙 정치의 불안정과 붕당의 심화 속에서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서인의 일당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고, 19세기에는 이른바 세도정치로 인한 권력 집중 현상으로 조세 제도가 문란해졌고 관료들의 탈법이 현저해졌다.

창원 지역 또한 삼정(三政)이 문란하고 지역 관리들의 농민들에 대한 탐학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다. 삼정 중 특히 폐단이 심하였던 것은 환곡이었다. 농민들은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농민 봉기가 나타났다. 1801년(순조 1) 전지효(田志孝)가 중심이 되어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창원 괘서(掛書)사건과 1862년(철종 13) 농민 항쟁의 하나인 임술년 창원 민란이 대표적이다.

4. 조선 말기

1862년 농민 항쟁 이후로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수많은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1893년(고종 30) 10월의 창원 농민 항쟁인 계사년 창원 민란도 그 중의 하나다. 농민 항쟁이 발생한 표면적인 원인은 지방관의 탐학과 관아의 구실아치 및 향임의 농간, 토호의 불법적인 평민 침탈 등 봉건 지배 체제와 관련된 폐단에 있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체기에 이른 봉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었다. 즉 전호(佃戶)의 입장에 놓여 있던 농민이 급속히 분화되어 토지에서 쫓겨나고, 향촌의 지배 구조에서 유리된 중산층과 몰락 양반층이 조세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개항 후 지배층의 수탈이 한층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대외적인 측면을 보자면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일본 주도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된 이후,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진출이 시작되었다. 일제의 침략적 진출이 본격화 되는 시점에서 진해에는 일제에 의해 군항(軍港)이 건설되면서 한반도 침략의 전략적인 교두보가 마련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