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5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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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露日戰爭-鎭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윤상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9년 5월 1일 - 마산포 개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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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2년 1월 - 영일 동맹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4년 2월 - 러일 전쟁 발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4년 2월 6일 - 일본군 마산포 불법 점령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4년 3월 - 일본군 칠원군 영도, 심리 일대 점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4년 5월 - 한산도에 포대 건축. 거제도 송진포에 해군 방비대 기지 구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5년 1월 - 가덕도 수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5년 5월 - 쓰시마, 울릉도 근해의 해전에서 일본 승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5년 11월 - 을사조약 체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6년 8월 - 진해만 일대 군항 예정 고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10월 - 진해만 시설 조사 위원 임명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8년 4월 - 임시 해군 건축 지부 설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9년 6월 - 해군 기지 위한 측량 시작 |
[정의]
러일 전쟁이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 지역에 미친 영향.
[역사적 배경]
러시아와 일본은 19세기 말에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으며 제국주의 국가로 변하고 있었다. 일본은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과 만주 지역에 대해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지만 곧 러시아의 견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에게 할양된 랴오뚱[遼東] 반도를 청에 반환[삼국 간섭]하면서 한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일본은 영향력을 만회하기 위해 당시 반일 세력의 구심점으로 지목되던 명성 황후를 궁궐에서 살해했고[을미사변], 얼마 후 1896년 2월 고종이 주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러시아의 세력이 일본을 압도하게 되었다[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계속된 협상을 통해 한국에서 러시아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는 가운데 러일 양국의 동등한 권리를 서로 승인함으로써 한국을 둘러싼 열강 사이에는 불안정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러일 전쟁과 진해]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1899년 마산포 개항을 둘러싸고 계속되었다. 마산포의 개항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남해안의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마산포에 동양 함대를 위한 조차지를 설정하기 위해,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갈등을 빚고 있었다. 때문에 러시아와 일본은 마산포 일대의 토지를 매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그 결과 마산포 공동 조계지의 경매가 과열되었고 다른 개항장에는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단독 조계지가 마산포에 설정되기도 했다.
1902년 1월 영일 동맹이 성립되면서 이러한 세력 균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어 갔다. 결국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한반도에 진주시켜 주요 지역을 사실상 강점하였다. 이때 군사적 요충지였던 진해만 일대는 일본군의 일차적 점거 대상이었으므로, 이미 2월 6일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마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전보사와 우체사를 장악하였다. 이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을 일본의 동맹국과 같은 지위로 만드는 한편 군사 작전에 필요한 곳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 시작과 함께 일본군이 한국의 여러 지역을 강점한 것을 추인해주는 한편,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많은 땅을 점거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3월에 칠원군 영도(寧島)와 심리(深里) 일대를 점거하여 포대를 쌓고 대포를 설치하였으며, 5월에는 한산도에 들어가 많은 전답을 훼손하면서 포대를 건축하였고, 거제도 송진포에 해군 방비대 기지를 만들기 위해 많은 땅을 수용하였으며, 1905년 1월에는 가덕도 일부를 수용하는 등 진해만 일대의 많은 지역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이들 기지에서 함포 사격과 해상 훈련 등 장차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대비한 모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1904년 10월 발틱해에서 출발하여 오랜 항해를 거친 러시아 함대를 1905년 5월 쓰시마[對馬島]와 울릉도 근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일본은 전쟁에 대비하는 해군 기지를 한반도에 설치하기 위해 조사 작업을 진행한 끝에 웅천군[현재의 창원시 진해구]과 거제도, 진해군[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등 진해만 일대를 해군 기지 설립 부지로 선정하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1906년 8월 진해만 일대를 군항으로 예정 고시하도록 하였다. 이후 현지 현지 조사와 헐값 매수를 거쳐 1907년 10월 진해만 시설 조사 위원을 임명하고 1908년 4월 임시 해군 건축 지부를 설치하는 등 군항 건설 작업을 본격화하였으며, 웅천군 일대와 거제도 일부를 포함한 약 1,300만 평을 군항 건설의 범위로 설정하고 1909년 6월부터 측량을 시작하면서 공사를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