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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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祚王-百濟初都慰禮城 |
이칭/별칭 | 하북 위례성,하남 위례성,직산 위례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종원 |
[개설]
백제 온조왕은 B.C. 18년 한강 유역에 국가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이때 백제의 도읍으로 삼은 곳은 위례성이었다. 그런데 온조는 B.C. 5년(온조왕 14)에 다시 도읍을 하남 위례성으로 옮겼다. 따라서 초도 위례성은 한강 이북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체로 중랑천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직산 위례성설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기록되어 있어 초도지를 직산에 위치한 위례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남 위례성은 이후 한성으로 불렸으며, 475년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왕도로서 기능하였다.
[백제 시조 온조왕, 위례성에 도읍하다]
백제의 건국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온조왕조의 온조·비류 설화 속에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이 B.C. 18년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으로 삼은 곳은 위례성이었다. 내용을 보면, 온조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도읍지를 물색하였는데, 온조는 한수의 남쪽, 즉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던 비류의 세력이 결국 온조에 합류하여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도읍의 형세는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고악(高岳)을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大海)로 막혀 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온조는 B.C. 5년에 도읍을 한수 이남으로 옮겼다. 처음 정했던 도읍은 동으로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이들이 영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없어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B.C. 6년 7월에 한산의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으며, 9월에 궁궐을 세운 후 이듬해인 B.C. 5년 정월에 천도하였다고 한다.
온조왕이 처음 도읍으로 한 위례성의 명칭에 대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먼저, 위례성이라는 것은 우리말의 큰 울타리(匡郭)를 사방으로 두른 것을 위리(圍哩)라고 하는데, 위례(慰禮)와 위리(圍哩)는 음이 서로 같다. 목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었으므로 위례(慰禮)라고 하였다고 하여 우리말의 ‘우리’를 그대로 음이 비슷한 한자의 ‘위례(慰禮)’로 표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조에 보이는 ‘욱리하(郁里河)’와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아리수(阿利水)’를 ‘위례’와 같이 한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서와 같이 백제왕에 대한 호칭인 ‘어라하(於羅瑕)’에서 비롯된 ‘왕성(王城)’의 뜻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라하가 대수장의 뜻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어라=욱리=아리와 연결되는 ‘위례’ 또한 ‘대(大)’의 의미로 간주할 수 있어 위례성은 ‘대성(大城)’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위례성은 어디일까?]
백제가 처음 도읍으로 하였던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온조가 초기의 도읍을 위례성에 정했다가 다시 한수(漢水) 이남으로 옮겼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다만 이들 도읍이 있었던 각각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지역이 거론되고 있다. 먼저, 처음 도읍을 두었던 곳으로 비정되고 있는 지역을 살펴보면, 직산과 한강 이북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온조왕이 처음 도읍으로 삼았던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서 구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중랑천 일대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B.C. 5년에 한강 이북에서 한강 이남으로 왕도를 옮겼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하남 위례성은 한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데, 그 위치는 경기도 광주를 비롯해 남한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에 비정되고 있다. 이 외에 한산을 도읍지의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 견해에서는 남한산 또는 남한산성에 비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 성과를 근거로 볼 때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왕도 안에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풍납토성이 북성, 몽촌토성이 남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이 왕이 일상적으로 거처하였던 왕성이고, 몽촌토성은 군사적 목적이나 별궁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위례성의 명칭은 천안 성거산에 위치하고 있는 위례산성에 남아 있다. 그로 인해 오래 전부터 이곳 위례산성은 백제 온조왕 대의 초도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직산 위례성설의 근거가 되는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삼국유사』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왕력표의 백제 온조왕조에서 도읍이 위례성인데 사천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직산이고, 온조왕 14년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라는 것이다. 기이편(紀異篇)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서도 미추홀은 인주이며, 위례성은 직산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 1429년(세종 11)에는 온조왕의 사당이 직산 지역에 지어지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온조왕에 대한 다양한 추모 행사가 행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직산 위례성이 백제 초도지인가, 아니면 백제가 언제인가 이곳에 도읍을 옮겼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리고 직산 초도설을 실증적으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논증이 필요하다. 백제는 B.C. 18년에 위례성에 처음 도읍을 정한 후 다시 B.C. 5년 정월에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따라서 직산 지역이 초도지일 경우 도읍으로서 기능한 기간은 불과 13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기원 전후한 시기에 백제 지역에는 마한 54국이 존재하였으며, 천안 지역의 경우에도 유력한 마한의 한 소국(小國)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천안 지역에 비정되는 소국으로는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目支國)이 있다. 그리고 목지국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는 대개 고이왕 대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26·27년 조에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병합된 마한은 사실은 목지국이며, 그 시기도 고이왕 대라는 것이다. 즉, 온조왕 대의 기록이 후대 사실의 소급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 천안 일대에는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이 3세기 중반까지 존재한 것이 되므로 초도 직산설과는 상충된다. 또한 천안 지역 소국이 목지국이었는가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각 지역에 소국이 분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직산 지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그렇게 쉽게 도읍을 옮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B.C. 5년의 천도 이유가 낙랑과 말갈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면 남쪽에서 오히려 그들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북쪽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따라서 초도로서의 직산설을 제기하는데 있어서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천안은 과연 백제의 첫 도읍지일까?]
천안 향토 사학계에서는 직산 초도 위례성설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왔다. 직산 초도 위례성을 인정하는 근거는 『삼국유사』를 비롯해 조선 시대 각종 지리지 등에 기록된 직산 초도에 관한 내용, 위례성의 명칭을 가진 산성의 존재, 백제 건국의 10대 공신으로 일컬어지는 조성과 전섭의 후예가 천안 지역에 거주하였다는 점, 여러 고고학적인 사실[유물, 적석 유구 등] 등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온조왕조의 위례성 주변 지형지세에 대한 설명이 직산 지역과 부합된다는 점도 주목되었다. 또한 온조왕이 도읍을 정할 때 올랐던 부아악은 용인의 부아산이며, 한수는 안성천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천안시에서는 초도지로 전해지고 있는 위례산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학술 조사와 고고학적인 조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위례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89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간단한 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995년 5월부터 7월에 걸쳐 본격적인 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1996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위례산성의 축조 시기는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 경으로 비정되었으며, 내부에서 삼족 토기편 등 다수의 백제 시대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사를 통해 성벽의 초축 시기나 산성의 운용 시기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확보되지 못했다. 이후 추가로 2009년 11월 5일부터 2010년 5월 20일, 그리고 2010년 9월 10일부터 2011년 1월 9일 두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성벽의 초축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수축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렇지만 내부에서 백제 시대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기 때문에 백제 시대 건물지 등 관련 시설이 분포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로 볼 때 석축성벽의 초축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확인되었지만 위례산성이 언제부터 조영되어 사용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산성으로서의 위례산성과 도읍으로서의 위례성을 동일지역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천안 위례성설의 배경은?]
현재 지역 연구자들이 천안 위례성을 백제 초도지로 비정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위례성이 초도지(初都地)로 불리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안 지역에 위치한 위례성이 실제 백제 초도지일 가능성이다. 다만 백제 초도가 13년간 경영되었다고 할 경우 고고학적인 자료를 찾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문헌 기록도 미흡하여 추가적인 자료의 확보가 필요하다. 둘째, 목지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다. 실제로 안성천 주변에는 소국의 도읍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 등이 남아 있다. 셋째, 공주 천도 과정에서 문주왕이 일시적으로 이곳에 머물렀을 경우이다. 문주왕은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는데, 문주왕이 즉위한 지역이 한성이 아니라 직산 위례산성이며, 이곳에서 한성의 상황을 살피면서 웅진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아신왕 대에 고구려 광개토왕에 밀려 일시적으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을 가능성인데, 구체적인 자료는 제시되고 있지 않다. 끝으로 사민(徙民)과의 관련성이다.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은 한강 북쪽의 민호(民戶)를 웅진 북쪽에 사민시켜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민된 한성인들이 정착하게 되면서, 백제 초기의 왕도명이었던 위례성을 지명으로 칭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직산 위례성설의 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분명한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자료가 확인되고 있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직산 위례성설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료의 축적과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