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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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천안 지역의 유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르는 말.
[조선 전기 유학의 흐름]
유교는 불교 및 기독교와 함께 한국 3대 종교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불교나 기독교와 같이 종교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한국인의 삶과 깊이 연관이 되어 한국사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1392년 건국된 조선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표방하면서 유교는 고도의 발전을 이루며 여러 유파를 형성하고 많은 유적을 남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경기도와 충청권 일대의 유학자 일군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이은 기호학파를 형성하였고, 기호 유학은 퇴계 이황의 영남 유학과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발전하였다. 사상적 차이는 문화의 차이를 낳아 호서 지방과 영남 지방의 지방색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기호학파의 맥을 이은 사족 집단은 붕당 정치 가운데 ‘서인’으로 집결하여 활동하였다. 서인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은 충청 우도[현재의 충청남도 일대]에 근거지를 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각 지역의 서원에서 정치적 공론의 장을 형성하였다.
[천안 지역의 다양한 유학적 학풍]
유학의 깊이가 더해간 17세기에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된 후 중앙 정계와 학문 세계를 호서 유학이 주도하였다. 호서 유학은 이기일원론과 주기론을 바탕으로 현실 참여적인 성격을 가지며 다양한 학풍이 공존하였다. 천안 지역 역시 대개 충청 우도에 속해 있었지만, 경기도와 충청 좌도의 중심지인 청주에 접해 있어 이 지역의 영향을 받았다. 일찍부터 동인과 기호 남인 계열이 자리 잡았고, 이러한 학문적 성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도동 서원이었다. 도동 서원에는 이황과 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던 대표적인 영남 남인계 인물인 한강(寒岡) 정구를 배향하고 있다. 정구는 말년에 목천에 우거하면서 죽림 강사(竹林講舍)를 세워 제자를 길렀던 인물이다. 그를 이은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후천 황종해(黃宗海)다. 영조 대에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을 때 반란군이 목천으로 들어왔던 것은 바로 이 지역의 학풍이 서인 노론계 일색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안 지역은 충청 우도의 다른 지역보다 다양한 유학의 학풍이 존재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훗날 북학파(北學派) 실학의 선구자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배출되었다.
[실학의 선구자 홍대용]
율곡의 성리학에 담겨 있는 실학적 학풍은 기호 남인 계열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 경세치용(經世致用) 실학에 영향을 미쳤다. 율곡의 학통을 이은 이들 중 비사승(非師承) 계열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는 북학파의 담헌 홍대용이 나왔다.
홍대용은 천안 수신면 장산리 출신으로 북경 방문을 계기로 서양 과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지전설(地轉說)과 우주 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할 만큼 선진적인 학문적 경향을 보였다. 홍대용은 중국 중심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하였고, 인간과 다른 생명체는 똑같은 것이라 여겼으며, 신분 차별에 반대하고 모든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저술인 『담헌서(湛軒書)』에는 홍대용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관한 견해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홍대용의 북학사상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에게 이어져 북학파 실학의 꽃을 피웠다. 홍대용의 과학적인 사고에는 근대 서양 과학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이 섞여 있어 혼란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조선 시대 가장 뛰어난 과학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한말의 유학자 노정섭]
노정섭(盧正燮)은 경기도 개풍군 풍덕 출신이다. 9세 때 광주군 연곡으로 이주하고, 23세 때에 경기도 가평에서 김평묵과 유중교의 사사를 받았다. 1876년 개항에 반대하는 연명유소를 올렸으며, 1889년 목천현의 서림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원래 속리산에서 우거하고자 하였으나 그 지역에 동학이 흥성한다는 소식에 염암(念庵) 윤병수의 주선으로 목천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이후 노정섭은 『정감록』의 십승지중의 한 곳인 목천과 진천 사이에 옮겨 살면서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난국에 처하는 방책으로 3책을 제시했는데, 상책으로 포경 입산(抱經入山), 중책으로 거의 치토(擧義致討), 하책으로 종풍 수속(從風隨俗)을 들고 자신은 학문을 하면서 절의를 지키기 위한 포경 입산을 택했다. 1896년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키자 유진하와 함께 전선전관 정창용을 유인석에게 추천하여 공을 세우게 하는 등 의병을 도왔다. 노정섭은 서학과 동학을 배척하는 척사적 태도를 견지하였으나 유학의 쇠퇴와 선비의 타락에 대하여는 크게 비판하였다.
[충(忠)·효(孝)·열(烈_ 인물 포상]
충(忠)·효(孝)·열(烈)은 삼강은 유교 사회의 중요한 덕목으로 유교 문화의 꽃이라고도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충신·효자·열녀에 대한 포장(襃獎)이 행해졌고,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 시대에 들어 국가적 차원에서 삼강 윤리의 보급이 줄기차게 추구되었다. 특히 전국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 포상하는 것은 정책적으로 중요시되었다.
포상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상물, 면세의 혜택, 본인 또는 후손에게 벼슬을 주는 것 등이 있다. 이 모든 상을 포함하는 최고의 포상은 바로 ‘정려’로, 정려를 받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따라서 한 집안이 충효열 인물을 배출하고 포상을 받는 과정과 결과는 사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천안 지역의 삼강 인물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세종실록』 1431년의 기사이다. 이후 『철종실록』까지 역대 실록을 찾아보면 천안군 11건[효자 6건, 열녀 5건], 직산현의 6건[절의 1건, 효녀 1건, 효자 3건, 열녀 1건], 목천현의 9건[효자 5건, 효우 1건, 열녀 2건]으로 모두 26건이 있다.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GC04500034_01 [표1] 역대 『실록』에 기록된 천안시의 충·효·열 포장 사례
조선 시대의 윤리서인 『동국 속삼강행실도』와 『동국 신속삼강행실도』의 삼강도(三綱圖)에는 천안시와 관련된 인물이 모두 12명에 달한다.
@@GC04500034_02 [표2] 『동국[속·신속]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천안시 인물
지리지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천안군·직산현·목천현에 각각 효자 1인씩 등재되어 있는데 천안군 양호(梁好), 직산현 봉유지(奉由智), 목천현 서만(徐萬) 등으로 이들은 모두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 후기 읍지인 『여지도서』에는 더욱 많은 인물이 등재되어 있다. 천안군 30명[충 2, 효 25, 열 3], 목천현 16명[충 3, 효10, 열 3], 직산현 1명[직산현은 읍지 편제상 인물 조가 부실한 편임]이다.
『여지도서』 이후에 편찬된 『충청도 읍지』[영조~헌종 연간]의 「천안군지」 인물 조에는 충신 2인, 효자 22인, 효녀 3인, 열녀 2인, 절부 1인이 기록되어 있다. 「직산현지」에는 충신 열전(忠臣列傳)·효자 열전(孝子列傳)·열부 열전(烈婦列傳)이 설정되어 있어서 행적이 비교적 자세하다. 수록되어 있는 인물은 충신 11인, 충노 1인, 효자 25인, 효부 4인, 열부 11인, 절부 1인이다. 「목천현지」에는 효자 9인, 열녀 5인, 충의(忠義) 8인이 기록되어 있다.
1863년에 간행된 『영성지(寧城誌)』는 천안군지의 별칭인데 여기에 충신 8인[고려 1, 본조 2, 신증 5], 효자 29인[고려 1, 본조 22(효녀 3 포함), 신증 6], 열녀 9인[본조 3, 신증 6]이 수록되어 있고, 다시 포상을 받지 못한 효열[미몽포효열질(未蒙褒孝烈秩)] 71인이 추가되어 있다. 목천현지인 『대록지(大麓誌)』의 인물 조에는 효자[효녀·효부 포함] 67인, 열녀 24인, 충의(忠義) 17인이 포함되어 있다.
이 후에 발간된 『호서 읍지』와 『조선 환여승람』 등에도 삼강 인물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나, 그 이전 사료보다 부족한 부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