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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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院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천안 지역의 학문과 제향을 위한 조선 시대 사설 교육 기관.
[개설]
서원(書院)과 사우(祠宇)는 조선 시대 중요한 사설 교육 기관이자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제향처(祭享處)로서 후진을 교육시키고 선비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려 말 안향(安珦)에 의해 성리학이 처음 전래된 이후 성리학은 조선의 정치 지도 이념으로서 기능하였고, 민간에는 문풍(文風)을 진작시키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을 연구하고 그 정신을 현양하는 공간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서원과 사우였다.
서원과 사우의 차이점은 사우는 선현을 추모하고 유덕(遺德)을 기리는 제사적 기능을 가진 것이라면, 여기에 더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적 기능까지 갖춘 것이 서원이라 할 수 있다. 서원과 사우는 대개 유현이나 충절인의 연고지 등에 세워지기 때문에 대대로 추모의 행렬이 이어졌고, 교화의 의미가 지대하였다. 서원에 모인 선비들은 학문을 토론하고 인재를 길러냈으며, 이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정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조선 후기에는 제향처와 교육처의 측면보다 정치 사회적인 역할이 강화되었다. 즉, 서원은 해당 학파의 본거지로서 인재 공급 기지가 되면서 정치성을 띠었고 정치권의 풍향에 따라 번성과 쇠락을 거듭하였다.
지역 사회에서는 서원 출입 인사가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론을 일으켰으며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위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원의 폐해가 심각해짐에 따라 1868년(고종 5)과 1871년 두 차례에 걸친 서원 철폐령으로 전국의 서원중 47곳만 남게 되었다. 천안 지역에는 사액 서원인 도동 서원이 목천에 있었다. 1871년에 훼철되어 복원되지 못한 채 현재 도동 서원 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도동 서원]
도동 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사액되면서 지역 양반 사족의 교육과 정치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도동 서원의 정치적 성향은 충청남도 지역의 서원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은 대부분 조선 시대 충청 우도 공주목과 홍주목에 속해 있었지만, 천안 직산 목천이 충청 좌도인 청주목의 고을이었다. 이 지역에는 동인-기호 남인 계열이 일찍부터 자리하였고 동방 5현 등 영남계의 인물이 제향되고 있는 특징이 나타난다. 충청남도 지역에 주로 서인계 인물이 제향되는 것과 비교가 되는 점이다.
도동 서원에 관한 기록은 『서원가고(書院可攷)』, 『문헌비고(文獻備考)』, 『동국원우록(東國院宇錄)』, 『조두록(俎豆錄)』, 『충청도 읍지(忠淸道邑誌)』, 『대록지(大麓誌)』 등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