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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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청동기를 도구로 만들어 사용한 시대.
[개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 시대(靑銅器 時代)로의 이행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9~8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 성과로 기원전 1300년경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늦어도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형성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가장 큰 요소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농경은 정착 생활을 가능하게 하여 취락의 형성을 가져왔으며, 따라서 농경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정주 취락(定住聚落)이 출현하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주로 강을 따라 펼쳐진 평야를 눈앞에 둔 구릉상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청동기인들이 목축·사냥 이외에 재배·농경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농경 생활의 흔적은 곡물의 흔적이나 반월형 돌칼[석도], 삼각형 돌칼 등과 같은 농경 도구를 통해 확인된다. 재배 작물은 조·기장·수수·콩과 같은 곡물류에서 보듯이 주로 밭 곡식이었으며, 부분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공주 지역과 가까운 부여 초촌면 송국리의 집 자리에서 출토된 탄화미(炭化米)는 당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농경과 함께 동물의 가축화도 현저하게 진행되어, 이제까지 수렵에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수렵과 어로도 여전히 행해졌으며, 경남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는 당시 수렵·어로 생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주거 생활은 신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수혈 주거지에서 살았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수혈 주거의 평면 형태는 원형에서 장방형으로 바뀌고 있으며, 면적도 넓어져 80㎡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20㎡ 정도이며, 수혈의 깊이는 50㎝ 전후이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지석묘]과 돌널무덤[석관묘]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대규모의 고인돌이 만들어진 사실을 통해 상당한 권력의 소유자가 출현하였으며, 또한 세습되었음을 보여 준다.
[현황과 유적]
천안 지역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유적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청동기 시대 전기에 해당되는 역삼동·흔암리 유형의 주거지와 취락이 다수 조사되었으며, 후기에 해당하는 송국리 유형 주거지도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백석동 유적, 신방동 유적, 불당동 유적, 쌍용동 유적, 두정동 유적, 청당동 유적, 운전리 유적, 용원리 유적, 용정리 유적, 두남리 유적, 봉룡동 유적 등이 있다. 집 자리의 형태는 대부분 (세)장방형의 역삼동·흔암리 유형에 해당하며, 연대는 기원전 13~9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유물의 양상은 대부분 토기류와 석기류인데, 토기류의 경우 기종 구성이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 토기류는 토기 상부에 문양이 있는 바리 모양 또는 깊은 바리 모양 토기, 사발[완] 등이 있으며, 석기류는 돌칼, 돌도끼, 돌화살촉, 갈돌 등이 있다. 특히 쌍용동 유적의 경우 송국리 문화로 대표되는 후기의 문화상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전기 취락의 점진적인 변화상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남관리 유적, 석곡리 유적, 대흥리 유적, 업성동 유적, 두정리 유적 등이 있다. 주거지의 형태는 방형 또는 원형의 송국리형으로 내부에서 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고 있다. 유물의 양상은 송국리형의 발형 및 옹형 토기 등과 돌칼, 돌도끼, 갈돌, 가락바퀴[방추차] 등의 석기류가 대부분이다. 연대는 기원전 8~5세기 정도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비정된다.
[의의와 평가]
천안 지역은 청동기 문화가 전개되면서 유적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특히 청동기 시대 전기 유형 가운데 하나인 역삼동·흔암리 유형의 취락이 다수 조사되었으며, 후기 단계에 해당하는 송국리 유형의 취락도 확인되었다. 특히 신방동 청동기 유적은 기원전 13세기부터 송국리형 주거지가 확산되는 기원전 8세기경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천안 지역은 청동기 시대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청동기인들의 삶의 터전으로 이용되었음이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백석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 전기에서 후기까지 지속된 최대 규모의 단일 취락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편년과 취락 연구에 기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토기 가마 1기(基)는 청동기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유일한 사례로 토기 굽기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불당동 유적에서는 주거지 내부 공간이 크게 거주 공간, 작업 공간, 저장 및 보관 공간 등으로 구분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당시 주거지의 공간 배치와 활용, 주거지별 가족 수와 세대 구성의 형태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용곡동 두터골 유적에서는 주거지에서 벼의 규산체가 다량 출토되어 청동기 전기에 이들 지역의 벼 재배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하다.
천안 지역은 주거지 유적이 다수 확인된 것에 비해 고분 유적은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2013년 현재까지 조사된 고분 유적으로는 운전리 유적에서 돌널무덤 1기를 비롯해 병천면 가전리 고인돌 4기, 수신면 발산리 고인돌 1기 등이 있다. 돌널무덤은 주위에 도랑을 두른 형태의 청동기 시대 전기 무덤이고, 고인돌은 지표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남방식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