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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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木川細城山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내수 |
[정의]
개항기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속하는 목천의 세성산에서 재차 봉기한 동학 농민군과 관군이 벌인 전투.
[개설]
1894년 11월 18일[음력 10월 21일]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두 번째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던 목천의 세성산에서 동학 농민군과 관군이 전투를 벌여 관군이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역사적 배경]
목천 세성산 전투 이전의 천안 지역 동향을 살펴보면, 제1차 동학 농민군 봉기가 있고 나서도 조정에서는 탐관오리를 응징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청과 일본 두 나라가 한반도 지배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청일 전쟁을 조선 내에서 전개하여도 조선 정부는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무능함을 보였다. 그리고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갑오개혁에 착수하고 7월에는 일본과 공수 동맹(攻守同盟)을 맺어 도리어 일본군을 돕는 정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일본인 살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음력으로 1894년 8월 12일에 천안군에서는 당시 천안군의 모산 부곡(毛山部曲) 사람이자 동학 농민군인 김경선(金敬先)과 조명운(趙明云)이 일본인의 횡포에 분개하여 일본인 여섯 명을 살해하고 방을 붙여 조선인의 적개심을 자극하고 달아났다. 이에 관군과 일본군이 총력으로 수색하였고 김경선과 조명운은 나중에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였다.
이 사건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은 당시 직산·천안·목천의 세 군현에 꽤 많은 백성이 동학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천안 지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청군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 이후에 일본군의 왕래가 잦아 일본군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실제 천안 지역은 양반 계급까지도 동학에 가담하거나 은밀히 도와주기도 하였다.
[경과]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스스로 해산했지만, 이어서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 등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동학 농민군이 다시 한 번 봉기를 일으킨다.
세성산은 목천·청주·공주의 중간에 있는 산으로, 특히 한양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세성산에는 충청도 지역의 동학 조직인 북접(北接)의 동학 접주인 김복용(金福用) 등이 진을 치고 있어 그 기세가 대단했던 곳이었다. 만일 동학군이 기회를 잡아 이곳으로 북상한다면 한양이 중대한 위협을 받을 수 있고, 관군이 동학군을 선공하여 격파한다면 동학군의 전체 사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에 정부는 이두황(李斗黃)을 호서도 순무영(湖西都巡撫營) 우선봉에 임명하여 동학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결과]
세성산의 지세는 남·동·북 3면이 험준하고 서쪽만이 평탄하기 때문에 1894년 11월 18일 관군은 2개 소대를 세성산의 북쪽 비탈면에 숨고 동북과 동남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렇기에 동학군은 부득이하게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북쪽 복병의 추격을 받아 370여 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이 다치는 등 큰 피해를 보고 패배하였다. 이때 북접의 장수였던 김복용(金福用)까지 포로가 되어 참형당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목천 세성산 전투는 관군의 지연 유도 작전에 동학군의 제1진이 참패한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동학 농민군의 북상로가 차단을 당하였고 동학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