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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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安面萬歲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정의]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속했던 천안군 천안면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의 식민 통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 통치였다. 이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은 지속적으로 각 지역에서 발생하였고, 1919년에는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천안 지역에서도 경성[서울]과 평양 등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3월 14일 목천읍에서 천안 지역 최초의 만세 운동이 발생하였고, 천안면에서도 3월 29일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경과]
3월 29일 천안군 천안읍내에서 약 3,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는 일대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이문현(李文鉉)·허병(許柄)·최오득(崔五得)·인시봉(印時鳳) 등이었다. 천안 헌병 분대는 일본 수비대와 합세하여 발포하고 26명을 체포하였다. 당시 일본 헌병들은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두루마기에 파란 잉크를 칠하여 후에 이 표식을 보고 체포하였다 한다.
이문현과 허병은 3월 29일 오후 2시경부터 천안 시장을 돌아다니며 모여 있던 군중 속에서 양손을 들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뛰어다니며 군중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여 주동 인물로 체포되었다. 최오득은 30~40명의 군중을 모아 놓고 격렬한 연설을 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자 군중이 이에 화답하여 일제히 만세를 불러 주동 인물로 지목되었다. 또 최오득은 처마 밑에서 보고만 있는 사람들에게도 만세를 부르게 하였으며, 인시봉도 최오득과 함께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뛰어다녔다. 시위 군중 가운데 약 30명이 갓을 떨어뜨릴 정도로 이 날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결과]
재판 기록을 보면, 4월 18일 공주 지방 법원의 초심을 거쳐 5월 17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주동 인물 이문헌과 허병, 최오득, 인시봉에게 각각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한 것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