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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601
한자 木川土城
이칭/별칭 남화리 토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박재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3년 12월 - 목천 토성 발굴 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년 3월 - 목천 토성 발굴 조사 종료
현 소재지 목천 토성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성격 산성|토성
양식 판축 기법
크기(높이,길이,둘레) 약 4.5m[높이]|450m[둘레]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있는 삼국 시대의 산성.

[개설]

목천 토성(木川 土城)은 충남 대학교 박물관에서 1983년 12월부터 1984년 3월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목천 토성은 다른 이름으로 남화리 토성으로도 불린다.

[위치]

목천 토성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에 있다. 독립 기념관 주차장 부근에 해당하는 곳으로 독립 기념관에서 목천읍사무소로 가는 도로 면에 있는 흑성산 기슭에서 동남쪽으로 분기된 낮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한다.

[형태]

목천 토성은 판축(版築) 토성으로 구릉 위에 축조되었는데, 성벽은 구릉에서부터 평지를 포함하여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발굴 조사 당시 북쪽과 서쪽 부분에 성벽의 흔적이 190m 가량 남아 있었다. 전체 규모는 지형으로 볼 때 약 450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평지까지 연장된 성벽의 흔적을 감안하면 더욱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목천 토성의 성벽은 순수한 판축 토성으로서 기저부의 폭은 5.6m이며 높이는 약 4.5m로 확인되었다. 판축 성체(城體)의 시공 과정은 약 3.8m의 길이를 구간 단위로 하여 한 구획씩 이동하면서 축조해 갔는데, 이에 따라 3.8m 간격으로 공사에 이용된 목주(木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축조 방식은 화강암의 풍화 암반층에서 파낸 황갈색 사질토와 적갈색 점질토를 각 층의 두께로 2~3㎝에서 8~10㎝ 간격으로 교차로 쌓아 올렸다. 마치 시루떡을 한 줄씩 쌓는 모습을 하고 있다. 판축 성벽은 수직에 가까운 모습이어서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바깥 성벽의 겉면에 보강 시설을 마련한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다. 바깥 성벽 부분에 돌을 쌓아 올린 경우, 돌과 기와를 섞어서 쌓아 올린 경우, 기와를 쌓아 올린 경우 등 다양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판축 성벽은 대부분 원형(原形)을 잃고 있지만 높이는 약 4.5m 가량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서 토기 조각, 기와 조각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주로 통일 신라 이후의 유물이 주종을 이룬다.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 내부에서 통일 신라 이후의 유물만 출토되었지만, 성벽 축조에서 보이는 판축 기법과 주변 지역의 역사 지리적인 조건을 감안하면 목천 토성은 백제 시기의 토성으로 판단된다. 이를 근거로 백제 토성의 축조 방법의 하나로 목천 토성의 판축 기법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홍성 신금성(神今城), 나주 회진 토성(會津土城), 부여 부소산성 등 근래 백제의 판축 공법에 대한 조사가 실시된 결과, 목천 토성과 같은 판축 기법은 실은 백제 시기가 아닌 통일 신라 시기에 해당하는 7~9세기경에 축성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현황]

독립 기념관 조성 과정에서 성벽의 대부분이 제거되었지만 북벽부의 일부는 아직 형상이 남아 있다. 북벽은 목천 중·고등학교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목천 토성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산성 형식과 비교할 때 그 입지 조건에서 특이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차후 백제 시기 읍성의 기원 형식으로까지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목천 토성의 구조상의 특징인 판축, 입주, 석렬의 세 가지 요소는 일본 고대 산성의 한 유형인 신롱성 유적과 비교가 가능하여 한·일 고대 성곽 비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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