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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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稷山鄕校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리 164-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제연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35년 - 직산향교 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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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761년 - 직산향교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82년 - 직산향교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19년 - 직산향교 정문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22년 - 직산향교 정문 재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41년 - 직산향교 대성전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72년 - 직산향교 교궁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98년 - 직산향교 교궁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58년 - 직산향교 교궁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5년 - 직산향교 교궁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7년 - 직산향교 문묘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4년 - 직산향교 교궁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2년 - 직산향교 홍살문 중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5년 - 직산향교 명륜당 보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6년 - 직산향교 대성전 및 명륜당 보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7년 - 직산향교 담장 개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12월 23일 - 직산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09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직산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10년 - 대성전 지붕 보수 |
현 소재지 | 직산향교 -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군서리 164-1 |
성격 | 향교 |
정면 칸수 | 5칸[대성전]|5칸[명륜당]|3칸[동재]|3칸[외삼문]|3칸[내삼문] |
측면 칸수 | 3칸[대성전]|2칸[명륜당]|1칸[동재]|1칸[외삼문]|1칸[내삼문] |
소유자 | 향교 재단 |
관리자 | 직산향교 |
문화재 지정 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군서리에 있는 조선 시대 향교.
[개설]
직산향교(稷山鄕校)는 조선 시대에 충청도 직산현 지역의 지방 교육을 담당한 국립 교육 기관이었다. 창건된 시기는 문헌으로 확인되지는 않으며, 고려 후기 감무를 두었던 직산 지역이 1393년(태조 2) 지군사로 승격되고 1392년(태종 1) 감무로 강등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직산현으로 편제되었으므로 이 무렵 향교가 건립되었을 것이다. 창건된 곳은 구향교골이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을 거치며 향교가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며 정묘년(丁卯年)에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직산향교에는 소장 문서와 현판이 잘 남아 있는 편이어서 1700년대 이후의 운영 상황과 중수 연혁을 확인할 수 있다. 199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0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읍 군서리에 있다. 직산 서쪽의 성산 동편에 남향하여 계좌정향(癸座丁向)으로 서 있다. 직산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3㎞ 거리에 직산 초등학교가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직산향교가 있다. 직산향교는 마을의 민가를 지나 언덕이 시작되는 초입에 남향하여 위치한다.
[변천]
직산향교가 창건된 시기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창건 당시 직산향교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구향교골이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기와 조각이 수습되고 있다. 직산향교에서는 1588년(선조 21)에 이건하였다고 하나 관련 문헌은 없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소실되었다는 것도 고증할 만한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데 임진왜란 때 직산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가능성이 있다. 1735년(영조 11)의 「성묘 중수기」에는 교궁이 예전에 현치의 서쪽 성현(城峴) 아래에 있었는데 정묘년[1567년, 1627년, 1687년 중 하나로 추측]에 지금의 터로 이건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1841년(헌종 7)의 「직산현 대성전 중수기」에서는 1661년(숙종 2)에 정행오(鄭行五)가 공당의 서록에 이건하였다고 밝히고 있어 두 기록 간에 차이가 있다.
명륜당에 걸려 있는 20여 개의 현판은 향교의 중수 과정을 보여 준다. 1735년의 「성묘 중수기」에는 현감 이위보(李渭輔)에 의해 1735년에 중수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761년(영조 37)에도 중수되었는데, 당시 직산향교는 퇴락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수리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조○언(趙○彦)이 주선하여 중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어 1782년(정조 6)에 직산 현감으로 부임한 김이규(金履鍷)가 1784년에 봉름을 출연하여 전우를 보수하였고, 1785년에는 지역 유림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명륜당과 재사를 보수하였다.
1819년(순조 19)에는 성묘의 담장이 무너지고 명륜당의 문이 기울어져 현감 이흥일(李興一)이 주도하여 향교의 정문을 중수하였는데 3년 만에 큰 비로 수보한 곳이 무너짐으로써 다시 명륜당의 외문을 중수하였다. 중수를 주도한 인물은 박기복, 권중인 등이다. 1841년(헌종 7)에는 대성전이 중수되었다. 『직산성묘 중수절목(稷山聖廟重修節目)』에는 중수 과정과 비용, 물품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872년(고종 9)에 향교 교궁이 중수되고, 1877년(고종 14)에는 교답(校沓)을 중추(重推)하였으며, 1898년(광무 2)에는 교궁을 다시 중수하였다.
한편, 『충청도 읍지』에는 직산향교 건물이 대성전 4가 5칸, 전영(前楹) 5칸, 전사고 3칸, 전사청 3칸, 신문 3칸, 동재 5칸, 서재 5칸, 명륜당 3가 5칸, 동·서 협문 각 1칸, 행랑 10칸, 외대문 3칸이다. 인적 구성은 도유사 1원, 장의 2원, 장생(掌牲) 1원, 당장(堂長) 1인, 교생 30인[돌아가면서 수직], 수복 1인, 고자 1명이며, 노비는 사망하여 없다고 하고, 토지는 위전답이 5결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 강점기의 향교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6·25 전쟁 중 직산향교의 문묘 성현의 위판 제상 제구가 모두 파괴되어, 1952년에 167명의 찬조금으로 문묘가 중수되었다. 이후에도 1958년 교궁 중수, 1965년 교궁 중수, 1967년 문묘 중수, 1974년 교궁 중수, 1982년 홍살문 중건, 1985년 명륜당 보수, 1986년 대성전 및 명륜당 보수, 1987년과 1988년 담장 개축 등이 이루어졌고, 2010년 대성전 지붕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직산향교는 외삼문과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전면에 강학 공간이 명륜당을 두고 후면에 묘당 공간이 대성전을 두는 ‘전학후묘’식 배치이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두고 뒤에 명륜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는 담으로 막혀 있다. 명륜당 좌우에 협문을 하나씩 두고 이 문을 통과하면 다시 담으로 둘러싸인 횡으로 된 긴 마당이 나온다. 마당의 동편에는 서향으로 동재가 배치되어 있다. 조선 후기 기록에는 있는 서재가 지금은 없다. 동재의 동측 담에 붙여 화장실을 만들어 두었다. 이 마당 북편 구릉을 이용하여 대지를 조성하고 내삼문을 세운 다음 대성전을 배치하였다.
[현황]
직산향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제를 올리고 해마다 삭망일에 분양례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 시대 직산현 권역이던 현재의 직산면 일대의 유림이 주로 향교를 왕래한다.
최근에는 교화 사업과 방학 중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충효 교실을 운영하고, 미풍양속 선도 사업 등을 주관한다. 천안 교육 지원청이 주관하는 유적지 체험 학습의 현장으로 활용되기도 하며 앞으로 향교의 전통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의의와 평가]
직산향교는 조선 시대 직산현에 건립된 관학 교육 시설로 직산 지역의 공교육을 주도하였다. 고을의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교육 기능은 쇠퇴하였고 운영에도 어려움을 겪었음이 각종 기록에서 확인된다.
직산향교에는 1700년대 이후의 향교 상황을 보여 주는 성책 고문서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금록(靑襟錄)』, 『선생록(先生錄)』, 『선안(仙案)』 등은 17세기 이후 향교에서 활동했던 직산현 사족들의 면면이 드러나 사족 활동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교헌절목(校憲節目)』, 『직산성묘 중수절목(稷山聖廟重修節目)』 등은 향교의 경제 실태와 중수 과정이 상세하며 특히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교궁 중기(校宮重記)』와 각종 『도조기(賭租記)』도 직산향교의 경제 기반을 알려 준다. 또한 다른 흔히 보기 힘든 『향약(鄕約)』 22조 규약과 좌목은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그 밖에 명륜당에 걸려 있는 20여 개의 기문 현판도 1735년 이후 향교의 중수 과정을 나타내고 있어 직산향교 뿐만 아니라 충남 지역의 조선 시대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