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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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敏 |
이칭/별칭 | 면오(勉吾),충무(忠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허용기 |
[정의]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지평(持平)을 지낸 아버지 김충갑(金忠甲)과 어머니 창평 이씨(昌平李氏) 사이에서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서응문(徐應文)의 딸 부여 서씨(扶餘徐氏)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이 순국하였는데, 사후 문중에서 큰형인 김시회(金時晦)의 넷째 아들 김치(金緻)를 양자로 입양시켰다. 조선 8대 문장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이 김치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1. 임진왜란 이전
김시민(金時敏)[1554~1592]은 충청도 목천현 백전동(栢田洞)[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가전리 잣밭] 출신으로, 25세 되던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다. 훈련원에 부임한 후 무기가 녹슬고 군인들의 기강이 해이하여 유사시에 제대로 쓸 만한 병기와 군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훈련원의 행정실무를 지위하는 판관이 되었을 때 병조 판서에게 두 번이나 이에 대해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훈련원에서 물러나 고향인 잣밭으로 내려와 생활하던 중 1583년(선조 16)에 니탕개(尼蕩介)의 난이 발발하였다. 니탕개는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女眞人)으로 변방 6진에 출입하면서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후대를 받아온 인물이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우참찬 겸 황해도 도순찰사였던 정언신(鄭彦信)을 진압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정언신은 이순신·신립·이억기·김시민·원균 등 당시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 장수로 거느리고 출정하여 적군을 두만강 너머까지 추격하여 근거지를 소탕하는 등 반란을 진압하였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김시민은 다시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종5품직 군기시 판관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전해인 1591년에는 진주 판관으로 부임하여 진주 목사를 보좌해 행정 실무를 담당하면서 군정 등에 참여하였다.
2. 임진왜란 시 활약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신병을 핑계 삼아 지리산으로 피신했던 목사 이경(李璥)이 사망하자 김시민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의해 진주 목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이후 진주성을 지키며 매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김시민의 공이 인정되어 정식 진주 목사로 승진하였다. 1592년 9월에는 진해의 왜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아 몽진 중인 선조에게 압송한 전과로 비변사의 장계에 의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오자 3,800여 명의 관민(官民)을 이끌고 적장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이끄는 3만의 군대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의병장 곽재우·최경회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며 승리를 도왔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막아낸 후 성안을 순회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적군이 쏜 탄환을 왼쪽 이마에 맞았고, 며칠 뒤인 10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전사하기 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묘소]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忠愍祠)에 김시민의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6월 25일에 김시민을 선무공신 2등과 상락군에 봉하였으며, 10월 29일에는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관작과 품계를 2등급 올려 영원히 사유의 은전을 받도록 하였고, 반당 6명·노비 9명·구사 4명·전지 80결·은자 7냥·내구마 1필을 하사하였다.
또한 1709년(숙종 35)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하고 영의정에 추증하는 한편, 1711년(숙종 37)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4일에는 박문수 어사의 진언에 따라 동래 부사 송상헌의 사당에서 김시민을 우선 함께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김시민의 추모 행사는 과거 진주·천안·괴산 등지에서 행해졌으나, 1868년(고종 5) 9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각지의 사당이 훼철된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 후 부분적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생지인 천안에는 과거 김시민을 비롯하여 아버지 김충갑, 숙부 김제갑(金悌甲) 등을 함께 모셨던 충열사(忠烈祠)가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추모 사당 및 생가 복원이 되지 않아 김시민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다만 2000년 7월 19일에 설립된 민간단체인 ‘충무공 김시민 장군 기념 사업회’가 매년 김시민의 출생일인 양력 9월 23일에 탄신 기념 행사를 개최하는 등 추모 행사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경삼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