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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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忠甲 |
이칭/별칭 | 서초(恕初),귀봉(龜峰),구암(龜岩),오죽산인(悟竹山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조항덕 |
[정의]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서초(恕初), 호(號)는 구암(龜岩)·오죽산인(悟竹山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수형(金壽亨)이고, 할아버지는 종사랑을 지낸 김언묵(金彦黙)이며, 아버지는 진사 김석(金錫)이다. 외할아버지는 기형(奇逈)이며, 부인은 창평 이씨(昌平李氏)이다. 아들은 김시회(金時晦)와 김시민(金時敏)인데, 김시민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의 영웅으로 시호가 충무이다.
[활동 사항]
김충갑(金忠甲)[1515~1575]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처음에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에게 사사하다가 조광조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자 만년에는 아우 김제갑(金悌甲)과 더불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다.
1543년(중종 38)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34위로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 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북평사 등을 지냈다. 을사사화 때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1547년에 삭직당하고 청주의 수신 지역으로 유배되어 21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선조 즉위 초에 방면되고 복관하여 1573년(선조 6)에 홍문록 과시(課試)에서 14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안악 군수가 되었으며, 승려 보우(普雨)의 처벌을 건의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들 김시민의 공훈으로 순충보조공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과 상락군(上洛君)에 추증되었다. 현재 김시민 장군 유적지로 조성되는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 마을에 남아 있는 구암은 김충갑의 호가 유래된 바위로서, “김씨 세거 백전동”이라는 명문이 바위 후면에 새겨져 있다.
[학문과 저술]
1814년(순조 14) 후손 김우원(金禹元) 등이 편집하여 간행한 시문집인 『구암집(龜巖集)』 2권 2책이 전한다. 『구암집』은 권1에 시 127수·사부 23편·전(箋) 3편·비문 2편·발 2편, 권2는 부록으로 세계(世系) 1편·연보 1편·지(誌) 2편·적록(蹟錄)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절개 높은 선비로서의 강직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부록의 「을사사적(乙巳事蹟)」과 「을사록」은 후세의 불의와 부정을 경계하기 위하여 을사사화 때 윤원형(尹元衡) 등의 비행을 기술한 것이다.
[묘소]
경기도 고양(高陽)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충청북도 중원군으로 이장했으나, 충주댐 공사로 인해 1977년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충민사 뒤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