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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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康基用 |
영어음역 | Kang giy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재학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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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 강완용(康完用) |
아우 | 강문용(康文用)|강윤용(康潤用) |
상훈 | 국민훈장목련장 |
생년 | 1917년 |
몰년 | 1978년 |
본관 | 신천(信川) |
호 | 운호(雲湖) |
출신지 | 평안남도 용강군 서화면 용상리 |
아버지 | 강병열(康秉烈) |
어머니 | 청주한씨(淸州韓氏) |
아내 | 임관익(任寬益) |
[정의]
현대 청주지역의 육영 사업가.
[개설]
학교법인 서원학원(西原學園)을 설립하여 운영한 육영 사업가이다.
[가계]
본관은 신천(信川)이며, 호는 운호(雲湖)이다. 아버지는 강병열(康秉烈),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부인은 임관익(任寬益) 여사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1917년 평안남도 용강군 서화면 용상리에서 강병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학력]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1932년 진남포에서 진남포 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 법경전문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활동사항]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뜻하지 않은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여 군수회사인 조선이연금속주식회사(朝鮮理硏金屬株式會社)를 다녔다. 그곳에서 강기용(康基用)[1917~1978]은 징병으로 불려가는 동포와 동료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였다.
1946년 10월 고당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 진남포시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대세가 기울어 역부족임을 알고는 1948년 7월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월남 후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청주농립농업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경희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953년 졸업 후 경희대학교 청주분교 강사와 충청북도 영동의 학산중학교(鶴山中學校) 교장을 역임하며 육영사업의 꿈을 키웠다.
6·25 전쟁 때 부산에서 피난하면서 어물장사를 하였으며, 전쟁 후에는 미군의 세탁업 등에 종사하며 돈을 모았다. 부를 축적한 그는 민족적 비극을 극복하고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창학의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1954년에 재단법인 신라학원(新羅學園)을 창설하였는데, 특히 부인 임관익 여사의 여성교육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낙후된 충청북도 여성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제일 먼저 청주시 남문로에 신라여중(현, 충북여자중학교)을 개교하였으며, 1958년에는 신라여상(현, 청주여자상업고등학교)을 설립하였다.
그 후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1960년에 모충동 구룡산(九龍山)[163.6m]으로 학원을 신축·이전 하였다. 이어서 1965년에는 운호초등학교, 1967년에는 운호중학교와 운호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9년에는 여성 교원의 양성을 위하여 청주여자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을 설립하였으며 학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교 설립은 계속되어 1974년에는 충북여자고등학교를, 1975년에는 보은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73년에는 전국사학재단연합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78년 62세로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이러한 육영사업과 교육발전에 공헌한 공적으로 1969년에 충청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72년에는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저술]
『세계평화를 위한 정치적 단일화의 미래학적 고찰』(1973), 『여명(黎明)의 횃불』(1976)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