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800657
한자 李滉
영어공식명칭 Yi Hwang
이칭/별칭 경호(景浩),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청량산인(淸凉山人),문순(文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순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1년연표보기 - 이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27년 - 이황 향시 진사시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34년 - 이황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34년 - 이황 승문원부정자, 저작, 박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36년 - 이황 중학교수, 호조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39년 - 이황 수찬 임명, 사가독서
활동 시기/일시 1542년 - 이황 의정부검상, 충청도어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43년 - 이황 성균관사성 임명, 낙향
활동 시기/일시 1548년 - 이황 단양군수, 풍기군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0년 - 이황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
활동 시기/일시 1551년 - 이황 낙향, 한서암에서 강학
활동 시기/일시 1552년 - 이황 성균관대사성, 상호군 임명, 낙향
활동 시기/일시 1556년 - 이황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0년 - 이황 도산서당 건립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이황 예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8년 - 이황 홍문관대제학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9년 - 이황 이조판서, 우찬성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70년연표보기 - 이황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70년 - 이황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 추증
추모 시기/일시 1573년 - 이황 이산서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576년 - 이황 도산서원, 여강서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02년 - 이황 봉람서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702년 - 이황 송학서원 배향
출생지 예안현 온계리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거주|이주지 계상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수학지 동호독서당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수학지 양진암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수학지 한서암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외가|처가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부임|활동지 풍기군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묘소|단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사당|배향지 봉람서원 -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이촌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송학서원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문신
성별
본관 진성
대표 관직 단양군수|풍기군수|성균관대사성|예조판서|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

[정의]

조선시대 경상도 예안현 출신의 성리학자.

[개설]

이황(李滉)[1501~1570]은 청송 지역에 학문적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조선시대 청송 지역에 많은 학자들이 이황의 영남학파를 계승하였고, 그를 배향하는 봉람서원송학서원을 건립하였다.

[가계]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는 문순(文純). 이황의 5대조 이자수(李子脩)는 고려 말에 상경하여 관직을 지내다가 안동부의 속현인 풍산현 상리(上里)에 정착하였다. 중훈대부(中訓大夫)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역임한 고조할아버지 이운후(李云侯) 대부터는 인근 안동 지방의 명문들과 중첩적인 혼인 관계를 맺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낸 이정(李禎),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이계양(李繼陽),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埴), 어머니는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딸 춘천박씨(春川朴氏)이며, 첫 번째 부인은 진사 허찬(許瓚)의 딸 김해허씨(金海許氏), 둘째 부인은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 권질(權礩)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이황 가문은 할아버지 이계양 대부터 경상도 예안현(禮安縣)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활동 사항]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고 생모 박씨에게 총명함과 선비의 자질을 배워 나갔다. 일찍이 작은아버지 이우(李堣)에게 『논어』를 배웠고, 시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급제하였고, 1532년(중종 27)에는 문과 별시 초시에 급제하였으며,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정자, 박사, 호송관, 전적, 호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1537년 어머니 춘천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낙향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후 관직에 복귀하였으며, 1541년 3월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41년 4월 지평에 제수되어 관직에 복귀하였고, 이후 수찬, 경기도재상어사, 세자시강원문학, 사헌부지평, 형조정랑, 부교리, 어사,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 10월 성균관의 교사직인 사성(司成)에 임명되었으나, 신료들 간의 정치적 대립이 심하여 성묘를 핑계로 낙향하였다. 이황은 그 후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반복하였다. 대신 고향 온계리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부름은 계속되었다.

이황은 더 이상 왕명을 외면할 수 없어 외직에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황이 요청했던 지역이 바로 청송도호부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48년(명종 3) 1월 단양군수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이황은 아쉬운 마음을 “청송백학수무분(靑松白鶴雖無分)[푸른 솔에 흰 학은 비록 연분이 없으나] 벽수단산신유록(碧水丹山信有綠)[푸른 물 붉은 산은 과연 인연이 있구나]”라는 시를 지어 달래었다. 1550년(명종 5)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청원하여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게 되었는데,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이후 다시 낙향하여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제자들과 함께 학문과 강학에 전념하였다.

1560년(명종 15)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완공되자,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570년 7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하여 강학과 학문에 전념하다가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이황은 생전에 청송 지역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청송 수고정(秀孤亭)은 이황이 편액(扁額)한 것이다. 그리고 이황은 청송 옥류정(玉流亭)을 읊은 「기진보정자중성주이절(寄眞寶鄭子中城主二絶)」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학문과 저술]

이황은 16세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성리학자로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이들을 영남학파 또는 퇴계학파라고 하는데, 청송 지역에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한 이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청송과 연고가 있던 이정회(李庭檜)·이정백(李庭栢)·박성(朴惺)·고응경(高應擎) 등이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로 활동하며, 지역 내 퇴계학파의 토대를 구축하고 학파의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

이황의 주요 저서로는『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자성록(自省錄)』,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경현록편정별록(景賢錄編定別錄)』, 『성학십도』, 「서명고증강의(西銘考證講義)」등이 있다.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건지산(搴芝山) 남쪽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황은 1570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로 추증되었다. 1575년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609년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전국 각지에 이황을 배향한 서원이 있는데, 청송 지역에는 1602년(선조 35) 건립된 봉람서원(鳳覽書院), 1702년(숙종 28) 건립된 송학서원(松鶴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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