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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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공자의 사상을 근간으로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실천된 학문적 활동과 의례적 행위.
[개설]
유교는 자기 수양과 학문을 통한 경세치민(經世治民)의 도리를 밝힌 공자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공자(孔子)의 사상이 한대(漢代)를 거치면서 음양오행설과 결합하여 우주론으로 확대되었는데, 송대(宋代)에 이르러 이기(理氣)와 성정(性情)의 개념이 결합되면서 성리학이라는 정교한 이론의 체계로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유교가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치자(治者)의 통치 이념으로 이용되었다. 그 후 고려가 과거시험에서 유교 경전을 시험 과목으로 채택함으로써 그 보급이 더욱 확대되었고, 고려 말 1290년 안향(安珦)이 주희(朱熹)의 성리학을 도입하고, 이어 조선이 그 이념으로 국가를 건립함으로써 이후 우리나라 유교는 종교와 같은 지위로 자리하게 되었다.
[연원]
청송 지역에 언제 유교가 전파되었는지는 문헌과 같은 객관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청송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청송은 경상도에 있어서도 오지로 삼국시대에는 그 일부가 고구려에 속하기도 하고, 신라에 속한 지역은 다른 현(縣)의 속현이었다. 삼국시대의 유교 보급 상황이나 청송의 지역적 특성으로 볼 때 이 시기에는 아직 청송에 유교가 보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청송은 줄곧 다른 지역의 속현으로 있었다.
청송이 완전히 독립적인 고을로 승격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나 청송에 유교가 보급된 것은 고려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퇴계 이황의 선조이자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시조인 이석(李碩)이 진보현리(眞寶縣吏)로 있다가 생원시에 입격(入格)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의 과거시험에서 『시경』, 『역경』, 『춘추』, 『예기』 등의 유교 경전이 중심 과목이었던 것을 보면, 진보에서 대대로 아전을 지낸 집안 출신의 이석이 생원시에 입격한 것은 당시 청송의 유력 집안에는 이미 유교적 교양이 어느 정도 보급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 진보 출신인 조용(趙庸)이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것을 보면 청송 지역에 유교의 보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청송이 고려 말부터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던 전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상주에 살던 손사성(孫士晟)이 장인인 만취당(晩翠堂) 권명리(權明利)를 따라 청송 안덕으로 옮겨와 살면서 과거를 준비하여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손욱(孫旭)은 단종 때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에 급제하고, 동생인 손소(孫昭)는 세종 때 생원이 되었다. 이처럼 과거시험에서 합격자를 배출했다는 것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유교의 보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유교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아무래도 향교의 건립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에서는 각 지방 관청의 관할 아래에 향교를 두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로 하여금 30~9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청송에서는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 전기에 진보향교와 청송향교가 건립되었다. 청송 지역에 향교가 설립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교가 급속도로 보급되어 나갔다. 그로 인해 청송 지역의 유교에 대한 이해가 심화하면서 타 지역의 저명한 학자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민세경(閔世卿)은 정암 조광조와 모재 김안국, 민상(閔祥)은 화담 서경덕과 현헌(玄軒) 목세칭(睦世秤), 서현(徐顯)은 학봉 김성일과 한강 정구, 서창(徐昌)은 학봉과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과 교유하였다. 이런 교류와 함께 유명 학자들에게 나아가 배우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이정회(李庭檜)와 박성(朴惺)은 퇴계 이황, 심학령(沈鶴齡)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조수도(趙守道)는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조기영(趙基永)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신즙(申楫)은 여헌 장현광의 문인이었다. 이런 교류와 수학의 경향을 보면 지역적으로 가까운 안동의 퇴계 학맥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는 초기에 향교를 중심으로 유교를 보급해 나갔다. 하지만 국가에서 그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지 못하게 되자 시간이 흐를수록 향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송에서도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관리들과 지역민들의 희사와 노력으로 그 명맥을 어렵게나마 유지해 왔다. 그러나 유림의 관심이 서원으로 옮겨가자 그 지위와 세력은 급격히 쇠퇴해 갔다.
1602년 송간(松澗) 이정회가 중심이 되어 퇴계를 배향하기 위한 봉람서원(鳳覽書院)이 건립된 것을 시작으로, 1702년에는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을 배향하는 병암서원(屛巖書院)과 퇴계를 비롯해 학봉 김성일과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는 송학서원(松鶴書院)이 연이어 건립되었다. 그러나 서원의 이러한 융성도 1868년 조정에서 훼철을 명함으로써 청송에서는 서원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황]
조선 이후로 서양의 문물이 들어와 새로운 교육 제도가 시행되고 과거시험마저 폐지되자 청송에서도 유교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퇴락의 길로 걸어가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고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48년 진보에서는 진보유도회(眞寶儒道會)를 결성하여 유교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유교는 새롭게 힘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가 되자 유교 신봉자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으로 인한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문화가 몰락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향교를 중심으로 유림이 결집했던 기존의 청송과 진보의 유도회는 전국 유림단체인 성균관유도회에 가입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청송의 유림에서는 유교의 전국적인 단체인 담수회와 박약회에 가입하여 유교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고령의 사람들로, 그들의 뒤를 이어 유교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인재를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