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6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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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忠祐 |
영어공식명칭 | Yoon Chun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587년 - 윤충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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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1년 - 윤충우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윤충우 쌍령전투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윤충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08년 - 윤충우 상렬사 배향 |
출생지 | 청송도호부 금연리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리 |
부임|활동지 | 쌍령 -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
묘소|단소 | 구평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리 |
사당|배향지 | 상렬사 -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파평 |
대표 관직 | 훈련원첨정 |
[정의]
조선 후기 청송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지낸 윤귀림(尹貴琳), 어머니는 권막형(權邈亨)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 윤계형(尹繼亨), 증조할아버지는 장사랑 윤일(尹逸), 부인은 염개산(廉凱山)의 딸 파주염씨(坡州廉氏)이다.
[활동 사항]
윤충우(尹忠祐)[1587~1637]는 1587년(선조 20)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 금연리(金淵里)[지금의 청송군 청송읍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 읽기와 더불어 무예를 익히는 데 열중하여 1621년(광해군 13)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관북(關北) 지방에 파견되어 변방을 지켰다. 이후 부사과(副司果)를 거쳐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다.
윤충우는 관직을 그만둔 후 고향 청송으로 내려왔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참전하였다. 이때 집안사람들에게 대장부(大丈夫)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죽어서는 나라를 수호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윤충우는 1637년(인조 15)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일대에서 펼쳐진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청나라 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부장(部將) 신수(申樹)가 쓴 뇌문(誄文)에 의하면 선봉장으로 병졸 100여 명을 이끌고 적진으로 진격하였으나, 그 후 소식이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학문과 저술]
윤충우의 행적과 추모와 관련된 글들을 엮은 상·하 1책의 『쌍령순절록(雙嶺殉節錄)』이 전한다. 이 책에는 전란 중 부인 파주염씨(坡州廉氏)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리 구평(九坪)에 묘소가 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의관(衣冠)을 장사지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봉훈랑(奉訓郞)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에 증직(贈職)되었다. 1808년(순조 8) 윤충우의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곡리에 상렬사(尙烈祠)를 건립하고 위패를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