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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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致明 |
영어공식명칭 | Yoo Chimyeong |
이칭/별칭 | 성백(誠伯),정재(定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777년 - 유치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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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05년 - 유치명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55년 - 유치명 지도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55년 - 유치명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856년 - 유치명 가의대부 승급 |
활동 시기/일시 | 1860년 - 유치명 동지춘추관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861년 - 유치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74년 - 유치명 부강서당 배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9년 - 유치명 부강서당에서 『주절휘요』 간행 |
출생지 | 안동대도호부 소호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
거주|이주지 | 안동대호부 무실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수학지 | 만우정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외가|처가 | 안동대도호부 소호 -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
유배|이배지 | 지도 -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
묘소|단소 | 수곡리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
사당|배향지 | 부강서당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지리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관직 | 동지춘추관사 |
[정의]
조선 후기 청송 지역에 학문적 영향을 끼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아버지는 진사(進士) 유회문(柳晦文), 어머니는 교리(校理)를 지낸 이완(李埦)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 할아버지는 생원(生員) 유성휴(柳星休), 증조할아버지는 유통원(柳通源)이며, 부인은 김복구(金復久)의 딸 선산김씨(善山金氏)와 신노악(申魯岳)의 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유치명은 퇴계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이다.
[활동 사항]
유치명(柳致明)[1777~1861]은 1777년(정조 1)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소호(蘇湖)[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5세 때 종증조할아버지 유장원(柳長源)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성장해서는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정종로(鄭宗魯)에게 학문을 배웠다.
1805년(순조 5)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전라도장시도사(全羅道掌試都事),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초산부사(楚山府使),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한성좌윤(漢城左尹), 병조참판(兵曹參判) 등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1855년(철종 6) 호군(護軍) 재임 중 대사간(大司諫) 박내만(朴來萬) 등의 탄핵을 받고 지도(智島)[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로 유배를 떠났다.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의 추존을 청원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유치명은 1855년 유배지에서 풀려나고, 1856년(철종 7)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나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고향의 만우정(晩愚亭)[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84세인 1860년(철종 11)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53권 27책의 『정재집(定齋集)』이 전하며, 『예의총화(禮疑叢話)』, 『상변통고(常變通攷)』, 『주절휘요(朱節彙要)』, 『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 『태극도해(太極圖解)』, 『가례집해(家禮輯解)』 등 다수의 예학서(禮學書)와 성리서(性理書)를 저술하였다.
유치명은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로 이어지는 김성일 계열 퇴계학통의 적통을 이어 받은 인물이다. 이에 안동 지역을 비롯해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와 진보현(眞寶縣)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유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옛 청송 지역에서 활동한 선비들 가운데 유치명의 문인으로는 권동벽(權東璧), 권병운(權秉運), 권봉규(權鳳奎), 권석장(權錫璋), 권석황(權錫璜), 권오규(權五奎), 김응건(金應楗), 남병인(南秉仁), 남수명(南守明), 이성화(李性和), 이응협(李膺協), 서병화(徐炳華), 서성희(徐聖熙), 서효원(徐孝源), 신광호(申光浩), 신익호(申翼浩), 신종호(申鍾浩), 신진운(申晋運), 장재덕(蔣在德), 조기록(趙基祿), 심응지(沈應之), 황원수(黃元守) 등이 있다. 또한 청송 지역 선비들은 1909년 부강서당(鳧江書堂)[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지리에 있음]에서 유치명의 저술인 『주절휘요』를 간행하며, 유치명의 학맥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였다.
한편, 1895년(고종 32) 을미왜변(乙未倭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전국적으로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청송 지역에서도 병신창의(丙申倡義)라 하여 1896년 청송의진(靑松義陣)이 조직되었는데, 당시 의병 지도부 상당수가 유치명의 문인으로 구성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74년(고종 11) 유치명의 학맥을 계승한 청송군의 달성서씨(達城徐氏) 일문이 주도하여 이상정(李象靖)·김종덕(金宗德)·유치명을 배향하는 부강서당을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지리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