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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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淵集 |
영어공식명칭 | Bae Yeonjip |
이칭/별칭 | 원서(元序),배연집(裵淵楫),배상언(裵尙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5월 5일 - 배연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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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배연집 산남의진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배연집 고와실전투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09월 01일 - 배연집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배연집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배연집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0년 - 고와실전투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안평길 402-4[하속리 925]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안평길 402-4[하속리 925] |
활동지 | 산남의진 - 경상북도 청송군 |
활동지 | 산남의진 - 경상북도 영천시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산남의진 장영수위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배연집(裵淵集)[1878~1953]은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장영수위(將營守衛)를 역임하였으며, 1908년 2월부터 서종락(徐鍾洛)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가계]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원서(元序), 이명은 배연집(裵淵楫) 혹은 배상언(裵尙彦). 1878년 5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하속리 925번지에서 아버지 배선화(裵善華)와 어머니 남원양씨(南原梁氏)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裵尙志)의 18세손으로 안동에서 세거하다가 청송으로 입향한 배유(裵惟)의 후예이다. 일명 배 포수로 불리던 역사(力士)였다. 관직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고 산남의진을 결성하자, 배연집은 의성(義城)의 박태종(朴泰宗)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6년 4월 대장 정용기가 신광면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간계에 속아 체포된 뒤 귀향하였다. 1907년 음력 4월 정용기가 재기하자 다시 참가하였다.
1907년 10월 2일 배연집은 정용기가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비안(比安)·의성 일대에서 의병을 소모(召募)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배연집은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소모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7일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이한구(李韓久),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圭燮) 등 지휘부가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하는 참극을 맞이하였다.
1907년 10월 7일 대장에 추대된 정환직이 산남의진의 진영을 재편성할 때, 청송 지역에서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던 이세기(李世基)는 중군장(中軍將), 임용상(林龍相)은 좌포장(左砲將), 김진영(金震榮)은 군문집사(軍門執事), 홍구섭(洪龜燮)은 진군지휘(進軍指揮)에 임명되었고, 배연집은 김성극(金聖極)과 함께 장영수위(將營守衛)에 임명되었다. 1907년 12월 11일 대장 정환직이 청하군 죽장면 고천(高川)의 각전(角田)에서 생포되어 총살·순국한 뒤 청송으로 귀향하였다.
1908년 2월 5일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으로 취임한 최세윤(崔世允)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持久戰)을 계획하여 24개 지역 79명으로 구성된 지역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이때 청송 동부진은 서종락이 지휘하며 주왕산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청송 서부진은 남석구(南錫球)가 지휘하며 철령(鐵嶺)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배연집은 서종락 부대에 참여하여 청송읍과 부동면[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배상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0년 배연집은 청송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종락과 함께 경주·영천·의흥·청송을 관할하는 일본군 수비대 합동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高臥室)로 들어갔다. 대장 서종락을 비롯한 청송 동부진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의병들은 고와실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吉安川) 백석탄(白石灘)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분대인 청송진은 해산하였다. 배연집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고와실 마을로 잠입하여 김씨가(金氏家)의 풍산유씨(豐山柳氏) 부인이 목화를 잣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고, 풍산유씨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1953년 9월 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