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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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南義陣 |
이칭/별칭 | 산남창의진,산남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영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6년 3월 - 산남의진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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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0년 - 산남의진 고와실전투 패배, 해산 |
전개 시기/일시 | 1906년 - 산남의진 출진 |
전개 시기/일시 | 1907년 - 산남의진 재기 |
전개 시기/일시 | 1908년 - 산남의진 지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결성 |
전개 시기/일시 | 1908년 - 산남의진 지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결성 |
발생|시작 장소 | 산남의진 - 경상북도 영천시 |
종결 장소 | 고와실전투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
성격 | 의병부대 |
관련 인물/단체 | 정용기|정환직|최세윤|이한구|정순기|손영각|홍구섭|서종락|김태언|이세기 |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천, 청송, 영일, 경주 및 경상남도 울산, 밀양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부대.
[개설]
산남의진(山南義陣)은 1906년 3월부터 1910년경까지 경상북도 영천, 청송, 영일 일대를 중심으로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 최세윤(崔世允) 의병장이 이끌던 의병부대였다. 의진은 처음부터 관동(關東)을 향한 북상을 목표로 정하고 활동하다 1907년 9월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후 의진은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 격렬하게 항쟁하다 1910년 청송군 안덕면에서 벌어진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역사적 배경]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대한 항거가 범국민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때 고종은 친서(親書)로서 국외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왕실 측근에게는 밀지(密旨)를 내려 대응 방안을 강구하게 하였다. 이 무렵 시종관(侍從官) 정환직(鄭煥直)은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들고 장남 정용기(鄭鏞基)를 영남지방으로 내려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경과]
1906년 3월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경상도 각지에서 군사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산남의진을 일으켰다. 청송 지역에서는 홍구섭(洪龜燮), 서종락(徐鍾洛), 남석구(南錫球) 등이 많은 군사들을 모집하여 의진에 합류하였다. 청송 출신으로 의진에 참가한 사람은 약 60명 정도였으며, 그중 홍구섭, 서종락, 김태언(金泰彦), 이세기(李世紀) 등은 핵심 장령(將領)으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1906년 4월 정용기 대장이 잡혀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뒤 중군장(中軍將) 이한구가 의진을 이끌다가 해산하고 말았다. 같은 해 9월 대구 경무청(警務廳)에서 풀려난 정용기는 1907년 4월 의진을 다시 일으키고 장령들을 소모관(召募官)[소모사(召募使)]으로 각지에 파견하였다. 이때 청송 출신 남석인(南錫仁)과 이세기가 청송·진보 지역으로 파견되었으나, 남석인이 일본군에게 잡히고 이세기는 피신을 하였다. 그 뒤 정순기(鄭純基)와 이종곤(李鍾崑)이 청송 지역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의진으로 돌아왔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大韓帝國) 군대 해산으로 군인 출신 우재룡(禹在龍), 김성일(金聖一), 조선유(趙善裕), 김치현(金致鉉), 은순택(殷淳澤) 등 수십 명이 산남의진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의진의 활동도 본격화되었다. 군인 출신 인사들의 입진으로 의진의 조직력과 전술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산남의진은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관동으로 북상을 추진하였다. 의진은 청송 노귀재(老歸-)[노구재]와 안덕을 거쳐 8월 14일 신성(薪城)에서 전투를 치르고 청하군 죽장(竹長)으로 들어갔다. 정용기 대장은 각 지역에 배치된 유격대에게 북상을 준비시키고, 자신은 본진 100여 명을 이끌고 8월 29일 청하군 입암면 매현(梅峴)에 유진(留陣)하였다. 8월 30일 오후 4시경 일본군 제14연대 11중대 미야하라[宮原] 소위가 이끄는 청송수비대가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척후(斥候)의 보고를 받았다. 본진은 일본군이 청하군 죽남면 입암리에 들어와 유진할 것으로 예측하고, 우재룡, 김일언(金一彦), 이세기 세 부대를 입암 주변에 매복시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한 뒤, 본대가 일본군을 공격하여 섬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매복을 나가 기다려야 할 이세기가 9월 1일 오후 9시 30분경 입암리 골안마을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일본군 몇 명을 발견하고 공격을 감행하다 잠복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본진이 갑작스러운 총성을 듣고 입암으로 즉시 출격하였다. 9월 2일 오전 2시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가 입암전투이다. 여기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參謀將) 손영각 등 장령과 병사 19명이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환직이 의진을 수습하고 대장에 올라 다시 의진을 이끌었다. 의진은 북상길을 찾아 계속 활동을 하였으나, 일본군의 추격과 탄약의 고갈 등으로 의병들의 희생만 늘어가자 개인별로 농부나 상인으로 위장하여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으로 모일 것을 명하고 12월 8일 의진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정환직 대장도 곧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남은 장령들은 1908년 2월 보현산(普賢山)에서 최세윤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진을 편성하였다. 최세윤 대장은 일본군의 의병 초토화 작전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종래의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경상도 지역만이라도 지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지역별 소부대 유격전을 통한 지구전을 계획하였다. 본진은 동대산(東大山)을 근거로 경주·울산·흥해·포항 지역을 담당하며, 각 지역 부대는 본진과 연락하며 지대(支隊)별로 활동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청송 지역에서는 서종락이 주왕산(周王山)을 근거지로 청송동부진(靑松東部陣)을 지휘하였고, 남석구는 철령(鐵嶺)을 근거지로 청송서부진(靑松西部陣)을 지휘하였다. 서종락은 청송군 안덕 출신으로 휘하에 김진영(金震營), 참모장 심일지(沈一之), 중군(中軍) 우영조(禹永祚), 도총(都摠) 오상영(吳相泳), 소모장(召募將) 윤용식(尹龍植) 등 청송 출신 인사들로 부대를 편성하여 활동하였다. 남석구는 청송군 현동 출신으로 남석우(南錫祐)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결과]
최세윤 대장이 산남의진을 이끌었던 시기에 청송 지역에서는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가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08년 3월과 6월 사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해 7월 최세윤 대장이 잡히면서 여러 지대들과 함께 해체의 길을 걸었다.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도 1910년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이 전투에 참여하였던 청송 출신 인물로는 조창규(趙昶圭), 윤용식, 남석광(南錫光), 남석태(南錫台), 심지국(沈智國) 등이 있었다.
일본군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로 들어왔던 많은 의병들은 추격해 온 경주·영천·의흥·청송 지역의 일본군 합동 토벌대에게 고와실에서 참혹하게 희생되었다. 서종락 의병장은 물밑으로 30리를 도망하여 보현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은거하였다. 하지만 수많은 의병들은 잡혀 손발이 묶인 채 백석탄(白石灘) 물속 바위에서 학살당하였고, 이때 흘린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산남의진은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들고 일어났다는 점, 전국 연합의진(聯合義陣)의 서울 진공 작전을 선도하였다는 점, 항쟁 기간도 4년의 장기전이었다는 점, 당시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의진이었다는 점 등으로 한말 의병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청송 지역과 관련해서는 청송 출신 인물 다수가 의진의 지휘부에서 활동하였고, 지역적으로도 청송 지역이 의진의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