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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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帝國事件 |
이칭/별칭 | 시온산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4년 04월 25일 - 목사 박동기가 시온산제국 건국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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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45년 05월 21일 - 경상북도 경찰부가 박동기 등 33명 체포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
종결 장소 |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
성격 | 독립운동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청송군 지역에서 시온산제국 신도들이 독립운동을 펼치다 체포된 사건.
[개설]
시온산제국사건은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전쟁 동원과 종교 탄압에 직면한 기독교 장로교 신자들이 일본의 패망을 전망하고 펼친 반일반전운동이다. 1944년 4월 25일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출신의 목사 박동기(朴東基)가 시온산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헌법을 공포하였다. 박동기를 비롯한 시온산제국 간부들은 장관, 군사령관, 주일본조선총독 등 600여 명의 관리를 임명하는 한편, 연합군의 진주에 대비한 환영회를 준비하다가 1945년 5월 21일 경상북도 경찰부에 의해 지도자 33명이 체포되었다.
[역사적 배경]
기독교 장로교 목사 박동기는 1907년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수락마을에서 태어나 청송소학교를 마치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경영하는 대구보통성경학교 단기과정을 수료한 뒤 전도사 활동을 하였다. 박동기는 성경학교 재학 중이던 1928년 1월경 15일간의 단식기도를 통해 종교적 체험을 하는 등 열열한 기독교 신자였다. 1936년 3년 동안 장로교 포항교회에서 전도사업을 하며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청송군에 있는 매산(梅山) 산속에 피신하였다. 1940년 11월 29일 박동기는 종교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독립과 지상천국 건설을 목적으로 교단을 만들게 되었다.
[경과]
목사 박동기는 1944년 4월 25일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보현산 자락에 모인 청송·의성·성주·경산·청도·서울 등지의 신도들을 규합하여 시온산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정치기구로 내각을 발표하였는데, 박동기 자신은 태평왕지상대리(泰平王地上代理)를 맡고, 전권총리(全權總理) 채병하(蔡炳夏), 내무대신 정운훈(鄭雲薰) 등 6대신과 일본총독·육해공군 사령관 등을 임명하였다.
시온산제국은 산하 각 지방의 신도들의 비밀 모임을 개최하고, 그 연락망을 구축하여 각 지방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시온산제국의 건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연호는 도광(道光), 수도는 경주(慶州)로 정했다. 나아가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미국에 패한 뒤, 미국이 진주할 때를 대비하여 태극기와 성조기를 제작하여 환영회를 열 준비도 하였다.
1945년 5월 21일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의 시온산제국의 본부가 경상북도 경찰부의 급습을 받고 박동기를 비롯한 정운권·정운훈·황유화 등이 체포된 이후 6월 19일까지 청도 6명, 경산 16명, 왜관 5명, 구미 5명, 영천 1명이 체포되어 각기 관할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과]
시온산제국사건으로 체포된 신도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16일과 17일 석방되었다. 그 후 이 교단은 목사 박동기를 따르는 파와 시온산예수장로회의 황유하(黃維河)파, 그리고 대림동의 서석윤(徐錫潤)파로 갈라져 활동하였다. 1985년에 노회와 지교회를 조직하여 체계화하였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에 소재를 두고 있는 시온산예수장로회독노회가 있다.
[의의와 평가]
기독교 장로교회의 목사 박동기를 비롯한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시온산제국사건은 일제의 전쟁 동원과 종교 탄압에 저항하였던 기독교도의 항일운동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중에 전개된 독립운동의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