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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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井喆 |
영어공식명칭 | Nam Jeongcheol |
이칭/별칭 | 극삼(極三),청강(靑江),남정철(南定喆)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2월 5일 - 남정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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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남정철 산남의진 종사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2월 - 남정철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종사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09월 25일 - 남정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남정철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남정철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0년 - 고와실전투 |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113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113 |
활동지 | 산남의진 - 경상북도 영천시 |
활동지 | 만주 - 중국 만주 |
묘소 | 후평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산남의진 종사|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 종사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장.
[개설]
남정철(南井喆)[1888~1970]은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종사(從事)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 2월 의병장 최세윤(崔世允)이 소부대 단위로 유격전을 전개하자, 청송으로 귀향하여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의 종사로 의병 항전을 전개하였다.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삼(極三), 호는 청강(靑江), 이칭은 남정철(南定喆), 본명은 남정철(南井喆). 1888년 2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113번지에서 아버지 남희혁(南熙爀)과 어머니 월성김씨(月城金氏) 사이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남정철은 1906년 3월 서종락(徐鍾洛), 남석우(南錫佑), 남석인(南錫仁), 남석현(南錫睍), 김태언(金泰彦), 조태초, 오상영(吳相泳) 등과 함께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종사로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7일[음력 9월 2일]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鄭鏞基)를 비롯한 이한구(李漢久),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한 뒤, 대장으로 취임한 정환직(鄭煥直)의 휘하에서 입암(立巖), 동대산(東臺山), 화장(花壯)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7년 12월 영덕전투(盈德戰鬪) 이후 대장 정환직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청송으로 귀환하였다.
1908년 2월 산남의진의 3대 대장으로 취임한 최세윤이 지역 분대를 단위로 한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송 지역은 주왕산(周王山)을 중심으로 청송읍과 부동면[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 일원의 동부 지역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가 담당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고, 철령(鐵嶺) 일대의 서부 지역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가 담당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대장 서종락을 중심으로 중군(中軍) 우영조(禹永祚), 소모장(召募將) 윤용식(尹龍植), 군문집사(軍門執事) 조경옥(趙景玉), 참모장(參謀將) 심일지(沈日之), 도총(都摠) 오상영(吳相泳), 도포장(都砲將) 심지국(沈智國) 등으로 편성되었는데, 남정철은 종사를 맡아 활동하였다.
1908년 10월 이후 서종락, 김사곡(金舍谷), 윤상촌(尹裳村) 등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체포되거나 귀순함으로써 청송 지역의 의병부대는 점차 해체되어 갔다. 1910년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를 끝으로 청송의진(靑松義陣)이 해산된 뒤 남정철은 중국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1970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 후평(後坪)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