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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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錫球 |
영어공식명칭 | Nam Seokgu |
이칭/별칭 | 응서(應瑞)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 남석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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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남석구 산남의진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남석구 신성전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0월 - 남석구 자양전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0월 - 남석구 검단전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음력 3월 - 남석구 청송 현서면에서 일본군 격파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남석구 고와실전투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1년 - 남석구 사망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07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 신성전투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0년 - 고와실전투 |
출생지 | 청송도호부 도평리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
묘소 | 신당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청송 출신의 의병.
[개설]
남석구(南錫球)[1875~1911]는 1906년 3월 창의한 산남의진에 참가하였다가 1908년 3월 산남의진의 3대 대장 최세윤 휘하의 청송 서부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가계]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응서(應瑞). 1875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에서 아버지 남광하(南光夏)와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남석구는 1906년 3월 결성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는데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창의한 의병부대이다. 남석구는 청송 지역 영양남씨 일족인 남석우(南錫佑), 남석인(南錫仁), 남석하(南錫夏), 남석구, 남석술(南錫述), 남석광(南錫光) 등 17명의 한 사람으로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5월 21일 신돌석(申乭石)의진(義陣)이 영해(寧海)에서 관군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하던 대장 정용기가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 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간계에 속아 체포된 뒤 청송(靑松)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8월 정용기가 재기하여 의병진을 재편성할 때 다시 참여하여 영천·청송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9월 20일 청송 안덕의 신성전투(新城戰鬪)와 10월 1일 영천 자양전투(紫陽戰鬪), 그리고 10월 2일 영천 검단전투(檢丹戰鬪)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9월 1일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이한구(李漢久),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한 뒤,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의 휘하에서 입암(立巖), 동대산(東臺山), 화장(花壯)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7년 12월 대장 정환직이 청하면(淸河面) 각전(角田)에서 체포되어 순국한 뒤, 1908년 2월 최세윤(崔世允)이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산남의진은 소부대를 단위로 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청송 지역은 주왕산을 중심으로 청송읍(靑松邑)과 부동면(府東面)[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府南面) 일원의 청송 동부 지역과 철령(鐵嶺) 일대의 청송 서부 지역으로 부대가 편성되어 활동하였다. 이때 남석구는 청송 서부 지역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남석구가 지휘하는 서부진은 1908년 음력 3월 청송 현서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908년 4월 26일 현서면 복기동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같은 해 6월 20일에는 청송 남방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10년 안덕면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의 패배로 의병 활동은 종결되었다. 1911년 9월 7일 사망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 신당(神堂)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