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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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칠곡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본과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일본은 전쟁에 육군 15만, 수군 9천여 명을 투입하여 7년간 조선을 유린하였다. 일본의 침략은 1592년 4월 14일 부산성 침략에서 출발하였다. 일본군의 선봉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날 새벽에 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음날 동래성을 공략하였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동래에서 좌, 중, 우의 3개 노선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가 맡은 중로는 동래를 거쳐 양산, 밀양, 동래, 대구, 인동, 선상을 거쳐 조령으로 모여들고, 좌로를 담당한 2번대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동래에서 기장, 울산, 경주, 신령, 의흥, 군위를 거쳐 조령에서 1번대와 합류하였다. 우로를 담당한 3번대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김해를 거쳐 성주를 지나 추풍령을 따라 경기도로 올라가니, 칠곡역은 왜란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칠곡은 중로의 요충지로 일본군의 후속 부대가 통과하게 되거나 후방 경비대가 주둔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칠곡은 임진왜란 기간 중 일본에 저항하는 치열한 전투장으로 변하였다. 의병 활동도 칠곡 주변의 지형적 지세를 이용하여 활발히 일어났고, 낙동강을 이용한 적의 보급선을 저지하거나, 약탈물 반출을 막기도 하였다.
[석전의 패배와 주변 요충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적변의 보고를 받은 경상도순찰사 김수(金脺)는 각 고을에 통첩을 보내 소속부대를 지휘하여 대구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은 방법은 조선 세조 때 방어체제가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임진왜란 전 제승방략 체제로 변화한 때문이다. 급보를 받은 상주목사, 함창군수, 문경현감 등이 각각의 부대를 이끌고, 성주에 도착하여 감사의 지휘에 따라 대구로 향하였다. 이들은 현재의 왜관읍 석전리인 석전(石田)과 금호(琴湖)에 분산 배치되어 순변사를 기다렸지만, 수일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고, 오히려 적병만이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군중의 통제가 허술하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이 이르자 지레 겁먹고 오합지졸처럼 행동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지휘관들은 단기로 도망하고 군사들도 야밤을 틈타 흩어졌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살펴보면, 적군과 대치한 것이 아니라 대구가 함락되면서 피난민들이 일시에 밀어닥치자 적군으로 오판하여 겁먹고 도망친 것이었다. 이들은 적군이 잠복하고 있다가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여,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니, 주변에 병기와 군량미가 사방에 깔렸다고 한다. 이들은 팔공산으로 모여들었다. 석전에서 지휘관들의 도망이 금호부대, 고령부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들 역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이들은 1593년 명군이 팔거현에 주둔하면서 일본 추격의 전초기지와 전라도 칩입 방어선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때 역시 팔거현에 머물던 삼장(參將) 이령(李寧)은 당시 조선의 기근으로 군량미 수급이 원만하지 못할 것을 핑계로 요동으로 철수하고, 칠곡은 자력으로 왜군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옛날 왜관[현 약목면 관호리]에 있는 관호산성(觀湖山城)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토성으로 일명 왜성(倭城), 혹은 백포성(柏浦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인들이 표면적으로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통상을 하던 곳이지만, 실제로는 무역을 통해 군사기밀을 탐지해 본국으로 보고하기도 하던 일본의 거점 지역이었다. 강 건너편에 공식과 병기를 저장하던 창마라는 지역이 있어 왜란의 발생하자 저장해 둔 군수물자를 낙동강을 이용해 전방으로 보급하거나, 약탈물을 일본으로 빼돌리기도 하였다.
가산산성(架山山城)은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해발 902m의 산성이다. 이 지역은 영남 관문으로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을 통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과 백성들의 피난처이었다. 성 아래의 팔거(八莒)는 일본군 중로의 관문이었으며, 명나라 군대의 주둔지였다. 1640년(인조 18) 성을 정비하고, 칠곡도호부의 치소를 두었다.
칠곡군의 외곽지인 북삼면에 위치한 금오산성은 구미 지역과 경계에 있다. 산성은 구미와 칠곡 가산면의 경계선에 있는 산성으로 곽재우가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 천생산과 낙동강을 끼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방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폐성이었으나 험준한 지세를 이용 의병들이 모여들었고, 지역 주민들의 대피처가 되기도 하였다. 금오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1595년(선조 28)에 수축하여 정유재란 때에는 적의 북상로를 막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칠곡의 의병 활동]
임진왜란 기간 중 관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의병들은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칠곡 지역 역시 활동이 대단하였다. 의병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게릴라 전법을 활용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거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켰다. 임진왜란 초기 의병은 대체로 향촌의 지도층인 재지 사족들이 주도하였지만 의병의 주체는 지역 주민들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의병에 가담한 것은 일본의 침략으로 생활 근거지가 유린되고, 생활에 위협이 되자 동족 의식과 향토 보전 의식이 결합되면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당시 칠곡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의 피해는 극심하였다. 이에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요충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낙동강으로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적의 배를 습격하여 전방군(前方軍)의 활동을 위축하고, 각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여 전라도를 향하던 적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중 칠곡 출신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을 살펴보면, 구연우(具連佑)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전 부장(前部將)으로 공헌을 세웠다. 배정의(裵貞義)는 판서 배진(裵晉)의 손자로 부장으로 공을 세워 선무원종 공신에 오르기도 하였다. 백수화(白受和)는 전몽운(全夢雲)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을 지휘하여 금오산을 지키면서 피난민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소논동(蘇論東)은 수문장 최대윤(崔大胤)을 데리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역시 선무공신에 오르고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1640년 가산산성의 축성에 공로가 많아 ‘논동(論東)’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중 가장 피해를 입은 지역은 경상도 지역이며, 이중 대구와 그 인근 지역이 대표적이다. 특히 칠곡군 지역은 일본군의 침입로이자 퇴각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후방 기지로 장기간 주둔하면서 피해가 컸다. 당시 칠곡 주민들은 일본군, 명군, 그리고 동족 중 악당들의 삼중고를 당하였다. 이러한 만행에 칠곡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다.
첨정 송발(宋潑)의 처 이씨는 피난가다가 겁탈을 당하게 되자 사나지(沙羅池)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조정은 그의 죽음을 높이 평가하여 정려와 비각을 세워 주었는데, 현재 왜관읍 삼청리 경부선 철도변에 비가 남아 있다. 도사 이심옥(李心玉)의 처 곽씨는 산중으로 피난하던 중 왜군들에게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하자, 땅바닥에 엎드려 요지부동으로 있자 왜병들이 칼로 찔러도 움직이지 않아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14일 만에 죽었다. 그의 딸은 곽재기(郭再祺)에게 출가하였으나 근친하러 왔다가 전란을 만나 친정식구들과 피난 중 왜적을 만나자 암벽 발암(鉢岩)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인조는 그를 정표하고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삼천리에 쌍렬비(雙烈碑)를 세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