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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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陽趙氏 |
영어의미역 | Hanyang J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헌규 |
세거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금산리[야디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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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포남1리[개암] |
입향시기/연도 | 조선 중기/1540년 |
성씨시조 | 조지수(趙之壽) |
입향시조 | 조사(趙篩) |
[정의]
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조사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세거성씨.
[연원]
주(周)의 목왕(穆王)이 서언왕(徐偃王)을 정벌할 때 조부(造父)가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졌으므로 나라 이름을 따서 조씨(趙氏)라 성(姓)하여 조씨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한양조씨의 시조(始祖) 조지수(趙之壽)의 동래연대(東來年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조지수는 고려 때 조순대부첨의중서사(朝順大夫僉議中書事)를 지내고, 용진(龍津)에서 세거하였다.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으로 옮겨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繁盛)하였고, 많은 명신현유(名臣賢儒)를 배출하였으므로 본관을 한양(漢陽)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繼承)하였다.
[입향경위]
조사(趙篩)의 호는 노산(老山)이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시조 조지수의 8세손이고 영의정 충무공 조영무(趙英茂)의 증손이며, 지평공(持平公) 조완규(趙完珪)의 차자(次子)이다. 성삼문(成三問)의 문인으로 문재(文才)가 뛰어 났으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형 조범(趙範)과 함께 성주로 유배(流配)되었다. 형은 도중에 자결하고 혼자 성주에 은거하면서 장가를 들어 처가인 왜관읍 금산리[야드기]에 정착하였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여 석적읍 포남리를 중심으로 집성촌(200여 호)을 이루었다. 왜관읍 금산리 경모재 동편에 묘소가 있다.
[현황]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 220여 가구 660여 명이 칠곡군 관내에 살고 있다.
[관련유적]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에 매설헌(梅雪軒) 조완규(趙完珪)의 추모지소인 매설당, 조윤장(趙允璋)의 추모지소인 이로재, 유계(遊溪) 조승선(趙承先)의 재사(齎舍)인 저존재, 왜관읍에 노산(老山) 조사(趙篩)의 재사(齋舍)인 경모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