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86 |
---|---|
한자 | 忠州遷都論 |
영어의미역 | The Opinion of Moving the Capital to Chu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현길 |
[정의]
고려 후기에 제기된 충청북도 충주 지역으로의 수도 이전 주장.
[배경]
고려 후기 왜구가 무차별적으로 침입해 오는 상황에서 수도인 개경 방어가 불안해지자 도참설(圖讖說)이 횡행하였다. 이에 충주(忠州)는 내륙의 오지라는 점에서 공민왕 때부터 천도지로 자주 거론되었다.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지라는 충주의 지정학적 조건은 천도지로 주목되기에 충분하였다.
[전개 과정]
1357년(공민왕 6) 승려 보우(普愚)의 건의에 따라 한양에 천도하기 위해 궁궐을 지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한양 천도는 윤택(尹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백악(白岳)[현 장단]에 궁궐을 세우고 11월에 머물렀다가 1361년 3월에 환도한 일이 있다. 1369년(공민왕 18) 7월에 왕이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께서 매양 사중(四仲)의 해에 삼소(三蘇)에 순행했으니 나도 또한 장차 평양, 금강산을 돌아 충주에 주가(駐駕)하리라.”고 하여 충주에 순주, 또는 천도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다음 달인 8월 3일에 “삼소 순주의 하교로 평양과 충주에 이궁(離宮)과 노국공주의 혼전(魂殿)을 지음으로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겼다.”고 하고, 8월 4일에 판사천감사 진영서(陳永緖)가 “요즘 태백이 낮에 나타나고 연사(年事)가 흉황(凶荒)하니 정(靜)하면 길하고, 동(動)하면 흉하리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 뜻이 옳음을 알고 순주의 명을 거뒀다. 이 삼소의 순주는 참위설(讖緯說)에 의한 일로 본다.
이에 대하여 기록에는 “신돈(辛旽)이 비밀리에 시중 이춘부(李春富)를 시켜 충주 천도를 청하니 왕이 크게 노했으나, 신돈이 송경(개경)은 해구(海寇)가 두렵다고 하자 노염을 풀고 삼소의 순주를 명하여 길을 닦고 이궁과 혼전을 짓는 등 백성을 동원하여 고통을 겪게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신돈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영서의 주청으로 천도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로 보아 천도는 신돈이 꾸민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77년(우왕 3)에 윤항(尹恒) 등이 철원으로 천도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이 경성(개경)은 바다가 가까워 왜구가 두렵다며 천도를 논의할 때, 최영(崔瑩)이 군사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그러자 이인임은 “지금 적지(赤地)가 천리라 농부가 경작하다 말고 덕화(德化)를 간절히 기다리는데 군사를 동원하여 폐농하게 함은 묘책이 아니다.”고 하였다.
뒤에 이인임은 도당(都堂)에서 “지금 왜가 경도(京都)에 침구할 것을 꾀하는데, 충주는 바다와 거리가 멀고 사방의 도로가 대개 균등하니 마땅히 미리 태조의 진영(眞影)을 충주에 옮기고 송도를 방술의 땅으로 삼을 것이다.”고 천도를 논의하며, 충주가 천도의 대상지로 적합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최영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