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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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侵入 |
영어의미역 | Invasion of Japanese Pirat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미숙 |
[정의]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 해적의 침입 사건.
[개설]
왜구는 일본 남북조의 혼란기에 생겨난 집단으로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떼를 지어 수시로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 연안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등 만행을 일삼았던 해적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왜구는 고려시대 충정왕(忠定王)[1349~1351] 때부터 우왕(禑王)[1375~1388] 대에 창궐하였다. 이로 인해 해안지대의 농토는 무인지경으로 황폐해졌으며, 왜구 세력이 점차 수도인 개경에 가까운 지역까지 출몰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천도(遷都) 문제가 자주 제기되었다.
[충주 천도론]
왜구의 침입이 빈발하자 고려 후기에 자주 제기되었던 수도 천도 문제에서 자주 거론되는 곳 중의 하나가 충주 지역이었다. 1377년(우왕 3) 도당(都堂)에서 이인임은 “지금 왜가 경도(京都)에 침구할 것을 꾀하는데, 충주는 바다와 거리가 멀고 사방의 도로가 대개 균등하니 마땅히 미리 태조의 진영(眞影)을 충주로 옮기고 송도(松都)를 방술(防戌)의 땅으로 삼을 것이다.”고 하였으나 이는 끝내 실행되지 못했다.
[사고지 이전]
1381년(우왕 7) 7월 왜구가 김해부(金海府)에 침입하자 경상도안렴사가 “왜구가 축산도(丑山島)[현 경상북도 영해]에 들어와 안동 등을 침략하고자 하니 보주(甫州)[현 경상북도 예천] 보문사(普門社)에 소장된 사적(史籍)을 내지로 옮기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이에 고려 정부에서는 사관을 보내어 사적을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옮겨서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역대의 역사 기록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1383년(우왕 9) 왜구는 내륙 지역인 단양·제천·주천·평창·횡천·영주·순흥 등에까지 침입하였다. 이에 충주도 왜구의 위협에 안전하지 못하여 개천사에 있던 사적은 다시 죽주(竹州)[죽산]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겨졌다. 1390년(공양왕 2) 6월 왜구가 양광도를 침범하여 음죽·음성·안성·죽주·괴주 등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따라 12월에 전적을 다시 충주로 옮겼다. 이 고려시대 충주사고는 1392년 조선이 개국한 후에도 계속해서 전해졌다.
[왜구의 내침]
왜구로부터 안전한 지역으로 여겨진 충주도 1384년(우왕 10) 왜구의 내침을 맞았다. 왕은 개천사 주지로 있던 보각국사(普覺國師)를 염려하여 그를 광암사(光巖寺)로 옮기게 하였다. 1385년(우왕 11) 10월에도 왜구가 충주까지 침입하자 충주병마사 최운해(崔雲海)가 왜적 6급을 참하고 병장(兵仗)을 노획하였다. 최운해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로 특진되었다.
왜구가 다시 원주·충주·단양·제천에 침입해 오자 최운해는 조전병마사가 되어 왜구와 여러 번 싸워 적의 수급을 바쳤다. 이에 정부에서는 최운해에게 말과 비단을 내려주고 충주목사를 제수하였다. 그후 왜구가 전라도에 침입하자 최운해는 전주목사로 옮겨갔다.
[의의와 평가]
충주는 내륙의 오지로 알려져서 왜구의 피해에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곳이기 때문에 천도의 대상지로 제기되기도 했으며, 사고까지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시기에는 충주까지 여러 차례 침구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충주민이 합심하여 왜구를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