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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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實學 |
영어의미역 | Practical Scien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욱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민본과 위민을 주창하며 출현한 전근대적 사회개혁사상.
[개설]
실학은 18세기를 전후하여 당시의 사회모순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새롭게 나타난 사상이다. 유학의 해석에서 주자설(朱子說)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기를 거부한 범유학적(汎儒學的)·탈성리학적(脫性理學的) 경향의 사상으로서 선진(先秦) 유학 내지는 원초 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론 또는 왕정론에 기반을 두고 변법적 개혁을 추진한 국가재조(國家再造)의 사상이다.
실학자는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원초 유학의 이상형으로 제시되고 있는 왕도정치의 정론에 따라 고법(古法)과 고제(古制)를 조선 후기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 사회에 구현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말한다. 실학파는 실학자 상호간에 직접적인 유대나 연결관계와는 큰 상관없이 조선 후기의 지적 운동에서 드러나는 이와 같은 경향성을 공유했던 학인(學人)의 무리를 뜻한다.
실학파에 속한 학인으로는 유형원(柳馨遠) 이하 이익(李瀷)을 거쳐 홍대용(洪大容)이나 정약용(丁若鏞) 등 흔히 북학파 사상가로 불리는 일단의 인물들이 모두 포괄된다. 또한 19세기 중엽 헌종대에 활동한 이규경(李圭景)이나 최한기(崔漢綺)의 경우에도 실학자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
[대표적 실학자]
충주 지역과 관련된 대표적 실학자는 유수원(柳壽垣)·이규경·이학규(李學逵) 등이다. 유수원은 충주 태생으로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신분제와 이로 인한 산업의 미발달로 보았다. 이를 위해 신분제 개혁·문벌 타파·관제 개혁을 주장했으며, 나아가 상공업 진흥을 주장하였다.
이규경은 규장각 검서이자 실학자로 이름을 떨친 이덕무(李德懋)의 손자이다. 청년기에 최한기·최성환(崔瑆煥)·김정호(金正浩) 등과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충주의 덕산 삼전리와 성암리, 충청남도 서천군 세원 봉암리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그가 집대성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60권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古今事物)에 대한 수백 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천문·역수(曆數)·종족·역사·지리 등 모든 학문을 연구해서 1,400여 항목을 담은 책이다. 그 내용은 서양의 의술과 학문에 대한 관심, 도고상업에 대한 비판, 대외무역의 강조 등 그 폭이 매우 넓게 이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이규경은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할아버지가 이룩한 실학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꽃피운 박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 의의]
실학은 그 자체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제시한 개혁안의 상당 부분은 왕조 체제의 유지를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상당수가 몰락한 지식인 출신인 실학자들은 자신의 현실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하여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와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사회의 여론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이론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한 구체적 작업도 전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엽에 걸쳐 전개된 실학사상에서는 수취체제를 비롯한 제도 개혁의 의지가 강렬하게 표출되었으나,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민생과 직결된 요청들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내는 데에 특장이 있는 의미 있는 사상으로 평가된다.
유수원의 개혁 사상도 한때 영조의 관심을 끌었으나, 역모에 몰려 사형되면서 자신의 저술은 당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규경 역시 그의 박학다식을 들어주는 이는 자신의 아들밖에 없다고 스스로 한탄할 정도로 그의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당시의 사회적인 모순과 폐단을 직시하는 날카로움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