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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22
한자 李麟佐-亂
영어의미역 Rebellion of Yi Injwa
이칭/별칭 무신란(戊申亂),신천영의 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반란 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728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728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청주성[충청북도 청주시]
관련인물/단체 이인좌|민원보|이유좌|이진좌|민제상|이조겸|신태룡|민백효|민경효|민성효|민원해

[정의]

1728년(영조 4) 3월 이인좌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충청감영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사건.

[역사적 배경]

숙종 말년 소론은 세자(경종)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 반면,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뒤 숙종의 유명(遺命)이라는 이유로 경종의 뒤를 이을 인물로 연잉군(영조)을 지지하였다. 특히 경종이 젊은데도 노론 측은 경종이 병이 많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維賢) 등 소론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密豊君)[소현세자의 증손]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하는 데 이용되었다.

[경과]

1725년(영조 1)부터 박필현 등은 당론을 토대로 자파 세력으로 여겨지는 각 지방의 인물을 선별해 나갔다. 이에 이인좌(李麟佐), 신천영(申天永), 민원보(閔元普) 등이 가담하였다. 또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과 내통하였다. 이들은 가정(家丁)·노비 등의 가속을 군사로 모으고 도적 등도 군사로 동원하기로 하였다.

또한 민심을 움직이기 위하여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심유현의 발설과 결부시켜 퍼뜨림으로써 전국 여러 곳에서 흉서와 괘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이 외방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서울에서 내응한다는 정변 계획을 세울 수 있던 것은 유민이 급격히 늘어나고 도적이 기승을 부리며, 여러 사회 계층의 저항이 널리 퍼져 있던 당시의 사회 정세와도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이끄는 반군은 충청감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權瑞鳳)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하여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 주었다.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배하였다.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였다.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 등에 의해 상당성(上黨城)에서 궤멸되었다. 충주에서도 일찍이 율지동에 세거하던 민원보가 이인좌의 난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민원보는 연풍에 거주하던 유학 한대명과 충주에 거주하던 이조겸, 민백효(閔百孝), 민경효, 민성효, 민원해(閔元楷) 등을 일당으로 끌어들였다. 이들 민씨들은 남인 계였던 민암(閔黯)과 혈연관계에 있는 자들이었다. 아울러 청주에서 난을 주도했던 이인좌의 6촌으로 충주에 세거했던 이유좌와 이진좌, 그리고 이들의 문객으로 이유좌 등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이근 역시 모의에 참여하였다.

[결과]

이들은 민원보의 지휘 하에 충주읍성을 공격하여 함락할 계획을 세우고, 충주 산정리에 거주하던 유학 민제상에게 충주읍성을 공격할 때 충주목사와 영장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기기도 하였으나, 충주목사로 호서안무사를 겸하던 김재로(金在魯)가 지휘하는 부대와 의병 등에 체포되었다. 주모자로 지목된 민원보는 끝내 자복하지 않고 국문을 받다 사망하였으며, 이유좌와 이진좌 등은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원주로 도망갔다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 밖의 관련자들도 대부분 사형에 처해졌다. 김재로와 난의 진압에 공을 세운 충주의 사민, 군사들은 포상을 받았다.

충주 지역에서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세력은 주로 남인이나 소론 계열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충주읍성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주도 세력으로 몰려 처형당함으로써 충주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노론이 득세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사건에 충주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관련되어 당시 충주목은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인좌의 난은 조선 후기의 정치 체제, 권력 구조의 내부 모순을 민중을 동원하여 바꾸고자 했던 마지막이자 가장 규모가 큰 권력 투쟁이었다. 그러나 권력 투쟁에 실패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영조 왕권이 안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조 즉위 초부터 주창되어 온 탕평책의 실시는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민중 운동의 측면에서는, 16~17세기 이래의 고립적·국부적 민중 운동의 흐름을 수용하고, 당시 각 사회 계층의 이반 행동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점에서 조선 후기 민중 운동이 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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