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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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可興戰鬪 |
영어의미역 | Gaheung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헌주 |
성격 |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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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896년 3월 15일 |
종결연도/일시 | 1896년 3월 18일 |
발생(시작)장소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
관련인물/단체 | 유인석(柳麟錫)[1842~1915]|김백선(金伯善)[1873~1896]|안승우(安承禹)[1865~1896]|신지수(申芝秀)[1854~?]|이범직(李範稷)[1868~1896]|제천의병(堤川義兵) |
[정의]
1896년 3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서 제천 의병이 일본군을 공격한 전투.
[역사적 배경]
1895년 8월 20일 일본이 을미사변을 저지른 데 이어 친일내각에 의해 1895년 말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기 의병을 대표하는 제천 의병의 항쟁도 이루어졌다.
수운(水運)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상황에서 가흥리에 설치된 일본군 병참 기지는 한강을 통한 물길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서쪽 지방으로 이어지는 교통 및 물자 유통을 막고 있었다. 이에 제천 의병은 그들의 세력을 보존하고 서쪽 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가흥공략은 일본군이 남한산성의 의병을 치고자 수비가 허술해진 조건을 이용하여 수안보 전투와 동시에 추진되었다.
[경과]
1896년 3월 15일 가흥을 공략하기 위해 의병 부대가 출진한 뒤 3월 18일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300명 이상의 포군이 포함된 제천 의병 주력 부대는 크게 김백선의 선봉 부대, 신지수의 후군, 이범직 부대 등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매복과 협공을 통해 단번에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작전을 추진하였다.
새벽 5시경부터 시작되어 약 12시간 동안 치러진 전투는 병력의 규모와 치열함에서 제천 의병이 치른 전투 중 최대의 전투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실패의 원인은 처음에 40여 명이던 일본군 수비 병력이 충주에 파견되었던 병력까지 합세하면서 80여 명으로 크게 늘어난 데에도 있지만, 장수들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
공동 작전을 통해 가흥을 공략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김백선 등이 개별적으로 가흥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주력 부대가 투입되어 총력을 기울였던 가흥 전투의 실패는 큰 충격과 실망으로 다가왔다. 또한 아관파천과 단발령의 철회, 선유사 파견을 통한 고종의 거듭된 의병 해산 요구 등 정세 변화에 따른 내부 동요도 제천 의병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 결과 지도부에서는 가흥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노골적인 항명 파동을 벌인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을 처형함으로써 군기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백선 처형의 결과는 거꾸로 의병진 내부의 사기 저하와 일부 세력의 이탈로 이어져 제천 의병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주성 함락 이후 벌어진 가흥 전투는 제천 의병이 돌파구 마련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 전투였으나 실패함으로써 제천 의병이 근거지인 제천마저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 패배 후 이뤄진 김백선의 처형은 신분 간의 갈등을 겪었던 전기 의병의 한계를 잘 드러내 준 사건으로, 의병 전쟁이 신분적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