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703 |
---|---|
한자 | 忠州邑城 |
영어의미역 | Chungjueup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백종오 |
성격 | 성곽 |
---|---|
양식 | 읍성 |
건립시기/연도 | 조선시대 |
높이 | 3.5m |
둘레 | 1.7㎞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일대에 있던 조선시대 읍성.
[건립경위]
충주읍성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치른 뒤 전국의 성첩과 군기를 보수하고 대오와 군저를 확장하고 포수를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명을 받고, 1869년(고종 6) 2월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읍성을 개축하여 10개월 만인 11월에 완성하였다. 이때 개축된 성의 둘레가 3950척, 두께 25척, 높이 20척, 치첩(여장) 415칸이었다.
당시 조병로는 수축에 앞서 “읍에 성이 없고, 성이 없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났으니 어찌 옛날에 성이 있는 것을 알겠는가”라고 했다고 하므로 1869년 당시에 읍성이 대부분 폐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충주에 성이 있는가?” 하고 묻자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성이 있기는 하나 토적도 방어하기 어렵다.”고 한 점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 퇴락했음을 알 수 있다.
성은 신라 673년(문무왕 13)에 쌓은 난장성(薍長城) 또는 낭자성(娘子城)으로 추정되고 있어 신라 초축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1978년 발견된 충주읍성의 심방석을 통해 고려 1277년(충렬왕 3)에 충주성을 다시 쌓았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에는 꽃성[蘂城]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치]
충주읍성이 자리한 곳은 행정구역상 충주시 성내동 일대이다. 충주는 부산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로의 가장 중요한 지점 중에 하나로, 수운과 육로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형태]
충주읍성은 동북쪽 부분은 타원형을 이루는,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 형태이다. 읍성에는 동서남북의 4대문을 비롯하여 비상시의 통로인 야문(夜門)과 수구문이 있었다. 성내에는 객사(44칸), 아사(衙舍, 60칸), 남별당(南別堂, 17칸), 후영아사(後營衙舍, 24칸), 훈련청(訓練廳, 17칸), 향청(鄕廳, 24칸), 군관청(軍官廳, 9칸), 기패관청(旗牌官廳, 9칸), 양진창(楊津倉, 17칸), 사창(司倉, 103칸), 관청(官廳, 53칸), 주사고(州司庫, 8칸), 군기고(軍器庫, 27칸), 화약고(火藥庫, 2칸), 고마청(雇馬廳, 7칸), 실록각(實錄閣) 등이 있었다. 또한 성내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 3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황]
1869년 조병로에 의해 개축된 충주읍성은 1896년 유인석(柳麟錫)[1842~1915]이 이끄는 의병군이 충주성 탈환 전투 중에 4개의 문루와 수문청(守門廳)이 소실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에 의하여 시가지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모두 헐렸다. 현재는 시가지가 들어서 성의 현황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다만 성의 내부 관청 건물인 청령헌(淸寧軒)[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과 제금당(製錦堂)[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 그리고 충주성사적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충주읍성은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교통로인 영남로에 위치하는 군사적 중요 거점의 읍성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사고를 수호하였다. 비록 현재는 일본의 침략과 도시개발로 인해 대부분 흔적조차 확인하기 어렵지만, 충주의 역사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 주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