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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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砬 |
영어음역 | Sin Rip |
이칭/별칭 | 입지(立之),충장(忠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무신.
[가계]
본적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立之).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신말평(申末平)이며,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신상(申鏛)이다. 아버지 생원 신화국(申華國)과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녀로는 영의정을 지낸 첫째 아들 신경진(申景禛), 훈련도정을 지낸 둘째 아들 신경유(申景裕), 지돈녕부사를 지낸 셋째 아들 신경인(申景禋)과 선조의 넷째 아들 신성군 이후(李珝)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활동사항]
신립(申砬)은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겸비변랑이 되었다. 도총부도사, 경역을 거쳐 진주판관으로 부임해서는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에게서 수학했다. 1583년 온성부사로 부임해 북변에 침입해온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선조 20) 전라도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곧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병사를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전보되었다.
1590년 평안병사를 거쳐 1591년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재직 중에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4월 17일 조정은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상주로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고,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군사를 응원케 하였다.
당시 조선의 전략은 순변사 이일이 대구에 집결해 있는 경상도 군사들을 지휘하여 왜군의 북진을 일단 저지한 후 주장인 신립이 조령의 험난한 지세를 이용,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전방의 이일과 함께 깊은 종심방어선을 형성함으로써 왜군의 예봉을 제압한다는 구도였다.
그러나 순변사 이일이상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에게 패하여 돌아오자 4월 28일 신립은 조령에서 방어하자는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충주 북서쪽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5천여 왜군과 맞서게 된다.
신립은 왜군이 이미 조령 밑까지 육박해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조령에 이르기 전에 왜군과 마주치면 사태가 위급할 것으로 보았으며, 아군이 대부분 훈련되지 못한 병사이므로 사지에 몰아넣지 않고는 힘을 다 발휘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탄금대의 넓은 들판에서 빠른 기동력을 갖춘 철기마대를 예봉으로 삼아 왜군의 보병을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 같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 왜군의 조총 사격에 대오가 흩어지고 신립의 작전은 어긋난 채 결국 8천여 조선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신립은 전투 중 남한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립의 패전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선조도 마침내 한성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을 가기에 이르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 신대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평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충주시민의 축제인 우륵문화제 때 명현추모제를 지내며, 탄금대에 세워진 임진왜란 팔천고혼 위령탑에서 매년 제사를 지낸다. 탄금대에 충장공 신립 장군 순절비와 신립 장군 순국지지비가 있고, 충주시 호암동 우륵당 앞에 신립 장군 동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