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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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武官人 |
영어의미역 | Officials of the “Two Orders” |
이칭/별칭 | 문무관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헌주 |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문반직과 무반직에 임용된 충청북도 충주 출신 관인.
[개설]
충주는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군사와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어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과 통일신라의 중원경(中原京)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 이후에도 행정상의 중심지로 충주목(忠州牧)이 설치되어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충주 출신으로 문무관료가 된 인물은 충주목이 오늘날의 음성군과 괴산군 일부까지 포괄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시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과거제도는 고려시대 광종 때 쌍기의 건의에 따라 처음 도입된 이래 점차 비중이 높아졌으며, 조선시대에는 관리 선발의 주된 통로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로 운영되었다. 문과는 숭문주의의 영향에 따라 그 중요성이 무과에 비해 강조되었다. 잡과는 기술직이 신분제 사회에서 중인들의 과업이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충주의 문무관인은 넓은 의미로 충주에서 목민관을 지낸 사람, 충주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한 관직자, 충주를 관향(貫鄕)으로 하는 관직자 등을 두루 아우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좁은 의미로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명부인 방목(榜目)에 나타나는 인물의 거주지와 본관이 충주인 경우로 한정하고자 한다.
[관련기록]
충주 출신의 문무관인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로는 방목 자료가 있다. 생원과 진사시험인 사마시 합격자 명부인 『사마방목(司馬榜目)』, 문과 급제자 명부인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무과 급제자 명부인 『무과방목(武科榜目)』이 그것이다. 그 밖에 조선시대·일제강점기·해방 이후의 지리지나 시지 등의 자료에도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 자료는 지리지나 읍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530)·『여지도서(輿地圖書)』(1759)·『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1780)·『충주읍지(忠州邑誌)』(1870)·『충주군읍지(忠州郡邑誌)』(1898) 등이 있다. 일제시대 자료로는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1934)이 있다. 해방 이후 자료로는 『예성춘추』(1959)·『충주 중원지』(1985)·『인물지(충북도)』(1987)·『충주향교지』(1992)·『충주시지』(2002) 등이 있다.
[사마시 합격자]
『사마방목』에 따르면 조선시대 충주 출신으로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1447년(세종 29) 식년시에 첫 합격자를 낸 이래 1894년(고종 31)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모두 649명이다. 이 가운데 조경·윤신원·김광운 등과 같이 적지 않은 이가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점을 고려하면 실제 사마시 합격자수는 다소 줄어들 것이다.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수는 각각 318명, 331명으로 진사시 합격자수가 다소 많으나,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마시 합격자 가운데 거주지가 충주인 경우 518명, 본관이 충주인 경우 145명, 충주에 거주하면서 본관도 충주인 경우 14명이다. 성씨별로는 충주박씨가 가장 많은 41명의 합격자를 배출했으며, 그 뒤를 이어 충주지씨 30명, 충주최씨 24명, 충주안씨 10명, 충주석씨 9명순으로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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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주 출신 사마시 합격자수
[문과 합격자]
『국조문과방목』에 따르면 조선시대 충주 출신 문과 합격자는 1396년(태조 5) 첫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이래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모두 265명이다. 이 가운데 본관이 충주인 경우는 72명이며, 12개의 성씨가 확인된다. 충주박씨와 충주최씨는 각각 21명과 15명이라는 많은 수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 밖에 1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충주지씨(8명)·충주안씨(6명)·충주석씨(5명)·충주김씨(4명)·충주이씨(4명)·충주유씨(3명)·충주양씨(2명)·충주조씨(2명)·충주강씨(1명)·충주임씨(1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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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주 출신 문과 합격자수
[무과 합격자]
『국조문과방목』이나 『사마방목』이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친 합격자 현황을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종합 방목 형태의 자료인 반면, 『무과방목』은 현재 1회의 과거 합격자만 수록되어 있는 방목만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과 급제자의 전체상을 알 수 없으며, 무과에 합격한 충주를 대표하는 무인명만 확인할 수 있다.
어유소(魚有沼)는 1456년(세조 2)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야인 토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그후 이시애의 난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이수일(李守一)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 왜병 격퇴에 공을 세웠으며, 야인 토벌에서 활약한 후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임경업(林慶業)은 충주에서 태어나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합격하여 이괄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운 후 병자호란 당시 백마산성을 굳게 지키며 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 밖에 백남규(白南奎)는 과거제도가 폐지된 후 무장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무과 급제와는 관련되지 않으나, 충주 태생으로서 한말에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