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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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漁有沼 |
영어음역 | Eo Yuso |
이칭/별칭 | 자유(子游),정장(貞莊),정장(貞莊)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춘자 |
[정의]
조선 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자유(子游). 시호는 정장(貞莊). 아버지는 광주목사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어득해(漁得海)이다.
[활동사항]
어유소(漁有沼)는 1451년(문종 1) 내금위에 선발되고 1456년(세조 2)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복시직장,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 1460년 두만강을 건너 조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던 여진, 알타이, 골간, 올랑합, 올적합 등의 야인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절충장군으로 승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부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예성군에 봉해졌다. 1467년 겨울 명나라가 파저강 유역의 여진 부락을 토벌하면서 1만 명의 원병을 요청하자 강순(康純), 남이(南怡) 등과 출정하여 건주위의 족장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
그 뒤 함경북도절도사, 영안북도병마절도사겸경성부사를 지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에 올랐다. 어유소가 없는 영안도(현 함경남도·함경북도)에서 올적합의 세력이 강해지자 1471년 7월에 다시 영안도순찰사로 나갔고 8월에는 영안북도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북방 방어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무장으로서 임기를 두 차례나 넘기면서 머물렀다.
1476년 우참찬겸도총관, 1477년 병조판서, 1478년 의정부우찬성을 역임하고 1479년 명나라가 다시 건주위를 정벌하면서 원병을 요구하자 서정대장이 되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만포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지 않아 강을 건널 수 없어 자의로 회군했다. 이에 명의 의심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의 탄핵을 받아 강원도 양근군(현 경기도 양평군 일부)에 유배되었다가 1480년 어유소의 무재를 아낀 성종에 의해 이조판서겸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문신들의 극력한 반대에 부딪혀 행동지중추부사로 물러앉았다. 1482년에 다시 영안도순찰사가 되어 야인들을 다스렸고, 판중추부사겸도총관을 지냈다. 1489년(성종 20) 10월 성종의 군대 사열에 호종하여 경기도 영평현(현 포천시 일부)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럽게 기진해 별세했다.
어유소는 다른 무장들이 출전을 꺼리는 북방 지역에 난이 일어날 때마다 출정해 야인을 정벌한 ‘북벌의 명장’으로서 조선 초 대표적인 무장이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친절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주밀하여 선비의 기질도 갖추었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동두천시 광암동 미2사단 제2여단 관내에 있어서 미군들이 묘소를 돌보았으나 최근 후손들에게도 부대 출입증이 발급되어 현재는 자유로이 출입하여 묘소를 돌보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어유소 묘 앞에 어유소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성종군 어세겸이 지었고 안심서가 전자로 글을 새겼다. 어유소는 2006년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