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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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德樑 |
영어음역 | Yi Deokryang |
이칭/별칭 | 이현덕(李玄德),이덕명(李德明),하경(厦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정미 |
[정의]
조선 중기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충주 입향조.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현덕(玄德), 초명은 덕명(德明), 자는 하경(厦卿). 진안대군의 후손으로 슬하에 이연지(李延芝), 이연명(李延蓂), 이연래(李延萊) 3남을 두었다.
[활동사항]
1576년(선조 9) 충청도 괴산에서 태어난 이덕량은 1590년대 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로 이주하여 정착한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입향조이다. 관직으로는 행용양위부호군을 역임했다. 이덕량이 충주로 입향한 경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덕량은 임진왜란 때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게 되었다. 부모의 묘 자리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집이 가난하고 전란 중이라 어려웠다. 그러던 중 저녁에 과객이 들어서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하였다. 저녁밥을 지을 곡식이 없어 죽을 쑤어 과객을 대접하면서 미안해하자 과객이 괜찮다고 하면서 말하였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보아하니 상을 당하신 것 같은데 묘 자리는 잡으셨는지요? 잡지 못하셨으면 제가 아는 것은 부족하지만 보아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음 날 과객을 데리고 묘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던 중에 덕면 황금곡리(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어느 곳에 이르게 되었다. 과객이 말하기를 “이곳도 명당이지만 또 한 군데 명당이 있습니다. 그곳은 앉으면 안 보이고 서면 보이는 곳인데 옥관자(玉貫子) 서 말이 나올 자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다른 한 곳은 후손들이 발복하여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는 명당자리라는 것이었다.
이덕량이 다른 한 곳도 알려 달라고 하니까 과객은 “욕심이 너무 과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도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후손이 만대까지 번성할 자리이니 한 군데만 선택하십시오.”라고 충고하였다. 이덕량은 고관이 많이 나오는 것 보다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처음의 자리를 부모의 묘 자리로 쓰고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 60-2번지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묘역에 있다. 음동 마을회관 뒷산 골짜기에 입향조 이덕량 묘를 비롯한 다섯 기의 묘가 있다. 후손들에 의해 일명 ‘큰 능 산소’라고 불린다.
[상훈과 추모]
사후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