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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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斗煥 |
영어음역 | Seong Duhw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배항섭 |
[정의]
1894년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약한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개설]
성두환(成斗煥)[1845~1895]의 출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충청도 청풍 송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평민이었다는 설과, 조상 대대로 한의원을 하던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그를 토대로 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끌어들였다는 설이다.
[활동사항]
성두환이 동학에 입도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93년 청풍대접주로서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보은 집회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또한 동학농민운동 당시인 1894년 10월에 일본군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두환은 충청북도 지역 동학농민운동 대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1894년 7월 충청도 단양·제천을 대표하는 동학집강에 임명되었고, 7월 14일에는 충주에서 1천여 명의 농민군을 모으고 “앞으로 왜놈이 도처에 가득 찰 것이다”라고 하며 근처 동네마다 다니며 곳곳에 보루를 쌓았다. 청풍에 살던 유생 이면재에 따르면, 이때 충주 지역 민인들은 농민군 지도자 성두환에 대해 “모든 백성이 다 존경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같은 해 8월 충주 가흥 일대를 근거지로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등 폐정개혁 활동을 벌이다가, 최시형의 지시로 성두환의 무리를 설득하고 해산시키러 온 진천대접주 이종석(李鍾奭)과 다투기도 하였다. 7, 8월 동안 충주·청풍 일대를 장악하고 일본군과 대치하던 성두환의 농민군부대는 9월에 강원도로 진출하였다.
9월 1, 2일경 성두환이 이끄는 충청도 제천·청풍 등지의 농민군과 강원도 영월·평창 농민군 수천 명이 연합해 험준한 강릉 대화면 모로치를 넘었으며, 9월 5일에는 강릉을 점령하였다. 성두환의 부대가 강릉으로 이동한 사이, 청풍 일대에 일본군과 보수 양반층의 반격이 시작되자, 성두환은 급히 부대를 인솔해 남대천을 따라 단양, 제천, 영춘을 차례로 점령하고 충주 가흥 공격을 노리다가 일본군에 밀려 후퇴하였다.
이 무렵인 1894년 11월 1일 “개화(開化)를 주장하는 적신(賊臣)들과 난리를 조장하는 유도(儒徒)들이 외적(外賊)과 체결(締結)하여 군부(君父)를 욕되고 위태롭게 하며 도인(道人)들을 죽이니, 즉시 의기를 들고 모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포한 사람인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 성(成)’은 성두환인 것으로 보인다.
이 후 다시 강원도 쪽으로 물러난 성두환 부대는 영월·평창 농민군과 다시 연합, 10월 15일 정선을 점령하였다. 추격해 온 일본군과 강원도 평창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농민군이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를 끝으로 성두환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과 함께 서울에서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