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대구의 대중운동과 의열투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29
한자 日帝强占期 大邱- 大衆運動- 義烈鬪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20년대 대구에서 전개된 대중운동.

[대중운동은 일상생활을 지키고 독립 쟁취를 위한 노력이다]

일제강점기 대중운동이란 대중 자신들의 평범하고도 민주적인 일상생활의 이익을 지키고,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투쟁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대중운동은 청년, 노동자와 농민, 여성, 형평 등의 부문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

대중은 근대에 와서 자신들의 범주를 가지고, 근대 사회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갖는다. 대중들은 봉건적 사회관계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인간적 권리를 사회관계 속에서 정립하고자 한다. 아울러 식민사회에서 대중들은 자신들의 분야별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 전체의 모순 구조인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식과 행위를 내보였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대중운동은 자신들 공동의 이익을 위한 운동과 함께 민족문제의 해결과 극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대중운동은 완전한 독립, 곧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지향하고 전망하였다.

[청년운동]

일제강점기 청년운동은 근대적 이념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역할을 맡아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다. 대구의 청년운동은 1920년 1월 대구청년회의 창립에서 시작되었다. 대구청년회는 근대의 새로운 학문을 익힌 신흥 청년 지식인과 신흥 경제인 및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었다. 대구청년회는 ‘남선(南鮮)을 개발하고, 사회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창립되었으며, 대구청년회를 ‘신문명·신지식 수양의 최고 기관’이라 정의하였다. 그들은 ‘문화 발전 사명을 가진 대구청년회’를 내세우면서, 대구청년회의 목표를 ‘덕성 함양’과 ‘지식 교환’이라는 실력 양성에 두었다. 이처럼 대구청년회는 스스로에 대해 문화 운동의 중심 기관으로 설정하였다. 대구청년회는 근대 지식과 생활과 관련된 강연 활동에 역점을 두면서, 도서관 건립, 청년운동에 관한 선전 활동과 기금 마련 활동, 명신여학교의 지원과 같은 교육 원조 활동을 벌였다. 1923년에는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후 대구청년회는 ‘가판(架板)보다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언론의 촌평처럼 문화 운동의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잃어 갔다.

1923년부터 대구의 청년운동은 중앙의 ‘조선청년당 대회’와 맞물리면서 이념적 분화를 겪었다. 달성청년회의 조선청년당 대회 참가, 사상단체 상미회[이후 신사상회로 개칭]가 등장하였다. 1924년 대구청년회의 혁신과 대구제4청년회의 결성을 계기로 대구에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청년운동 단체가 등장하였다. 또 서울에서 청년운동의 전국적 지도기관인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된 것과도 연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25년 1월 아구청년동맹의 결성과 사상단체 철성단이 등장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더욱이 1925년 대구의 청년운동에서는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주도권 경쟁이 나타나 경북청년대회 개최와 경북청년연맹 결성을 놓고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대구의 청년운동은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의 청년운동 방침이 ‘무산 청년에서 전민족적 청년으로’ 전환하면서 파벌에서 통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1927년 6월 대구청년회, 대구청년동맹, 아구청년동맹, 무산청년회 등 4개 청년단체가 합동을 결의하고 대구청년동맹으로 통합되었다. 청년운동의 통합은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고, 대구 지역 학생층을 조직화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대구청년동맹은 1928년 경북청년연맹을 결성하는 데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구청년동맹은 1930년대 초반 일제의 만주 침략을 비판하는 격문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1920년 중후반 계속된 공산당 사건의 영향과 일제의 대중운동에 대한 탄압이 날로 거세지면서 대구의 청년운동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노동·농민운동]

대구의 노동·농민운동은 1920년 6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조선노동공제회 내 소마르크스주의 비밀결사의 일원이었던 정운해와 지역의 명망가들이 연계하여 설립한 것이었다. 그 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노동 관련 강연회, 노동야학 설립, 인쇄직공조합토목공려회와 같은 노동단체의 조직 등의 활동을 벌였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는 1922년 4월 제3회 정기총회에서 농민 정책을 채택하였다.

1923년 2월 제4회 정기총회를 열어 조직의 명칭을 ‘대구노동공제회’로 바꾸고, 집행위원제를 채택하였다. 1923년 3월 대구노동공제회는 농민대회를 열고 소작농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벌이면서, 달성군 각 면에 소작조합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에 따라 1925년 3월 달성군 11개 면 중 가창면·성서면·옥포면·화원면·논공면·해안면·월배면 등 7개 면에 소작인조합이 결성되었다. 이어 대구노동공제회는 조직 내에 농민부를 신설하고, 지세의 지주부담을 당면 과제로 설정하고, 궁극적으로는 ‘토지의 사회화’를 전망하였다. 대구노공제회는 1923년 가창면 소작쟁의, 1924년 화원면 소작쟁의를 원조하였다. 더욱이 1925년 달성군의 해안, 성서, 논공면의 지세 불납동맹과 지세반환 투쟁을 원조하고, 낙작인회를 결성하였다. 결국, 낙작인회는 소작인조합의 요구사항이 관철되는 방식으로 ‘달성군수의 징수한 말세는 속히 돌려줄 것’, ‘지세 불납의 원인에 따른 이작(移作)은 원래 소작인에게 돌려줄 것’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대구노동공제회는 1920년대 후반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을 지원하고, 개별적으로 신간회 대구지회에 가입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구노동공제회신간회 해소 이후 조선의 민족운동 방침이 바뀌자 의성, 경주 등과 같이 경북 지역에서 혁명적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성운동]

1920년대 대구의 여성운동은 1923년 1월 정칠성, 이춘수 등과 같은 여성들이 결성한 대구여자청년회에서 본격화되었다. 대구여자청년회는 일제강점기 대구 최초의 근대적 여성운동 단체였다. 1925년 3월 초 대구여자청년회는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념하는 강연회를 열고, ‘국제부인운동의 의의’, ‘여성으로 본 여성’ 등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이때 대구여자청년회정칠성은 경북 도단위 사상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정칠성은 1926년 1월 『조선일보』에 「신여성이란 무엇인가」를 기고하고, 진정한 신여성은 “모든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 의식을 가진 무산(無産) 여성으로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코자 하는 열정 있는 새 여성”이라고 정의하고, 신여성은 노동 또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 주장하였다.

대구여성회는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1928년에 근우회 대구지회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주요 구성원은 정칠성, 이춘수, 강정임 등이었다. 이들은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고, 특히 정칠성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근우회 대구지회는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한 부인 교육, 신간회 지지, 여성 평등, 부인 노동 옹호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아울러 근우회 대구지회는 여성들이 직업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길 기대하면서, 1928년 12월 편물 강습회를 운영하였다. 편물 강습회는 2주간 매일 3시간씩 운영되었으며, 이춘수정칠성이 편물과 양복 두 개의 과로 나누어 강습하였다. 그뿐 아니라 근우회 대구지회는 사회구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28년 여름 한재 때 경북한재대책강구회에 참여하고, 1930년 대구 팔공산 수해민 원조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 말 신간회의 해소와 맞물려 근우회는 해산을 위한 집회도 열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 근우회 대구지회를 이끌었던 여성들도 여성운동의 열정과 무관하게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대구의 여성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사회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기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형평운동]

대구의 형평운동은 피혁상 김경삼이 1923년 조선형평사 창립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김경삼이 백정들과 함께 1923년 5월 형평사 경북지사를 설립하였다. 이는 대구·경북 지역 형평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형평사 경북지사의 설립 총회에서는 대구에 경북지사를 두고, 그 아래 각 군에 분사를 설립하여, 교육 차별과 계급 철폐를 통하여 백정들의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설립 총회에서 지사장에 김경삼, 부회장에 이사현이 선출되었다. 1923년 6월 10일 형평사 경북지사의 발회식이 열린 것을 계기로 대구와 경북에서 형평운동이 본격화되었다.

형평사 경북지사는 1923년 12월 5일 도내 분사장 회의를 개최하고, 형평 분사의 유지 방침, 아동 입학 준비 등 교육 문제 등을 의결하였다. 또 형평사 경북지사의 사무 공간 마련을 추진하였다. 1924년 6월 형평사 경북지사는 대구 교외 고산골에서 50명의 사원이 참가한 가운데 ‘형평사 경북지사 설립 1주년 기념대회’를 열고 회관 건축 문제와 도수장 관리권 확보 등을 주요 의제로 논의하였다.

대구의 형평운동은 여타 대중운동 진영으로부터 옹호와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924년 3월 대구에서 열린 남선노농총동맹 결성대회에서 형평운동에 관한 결의사항이 채택되었다. 또 1924년 4월 청년운동에서 ‘형평문제, 형평운동을 계급적 방면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원조함’이라는 방침이 채택되었다. 1924년 6월 대구노동공제회정운해·이상훈 등은 형평사 경북지사의 설립 1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여 형평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응원과 지원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처럼 대구의 형평운동은 형평운동에 대한 지원과 연대를 내세운 대중운동 진영의 응원과 지원을 받았다.

대구의 형평운동은 1925년부터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형평사 경북지사는 ‘형평사 경북지사 임시총회’ 또는 ‘형평사 경북지방대회’를 열고 형평청년회 설립, 형평강습원의 설치와 같은 형평사원의 교육 향상, 반형평운동에 대한 적극 대응, 도수(屠獸) 및 건피장(乾皮場)과 같은 형평사원의 경제적 이익, 생산물의 공동 출하 등과 같은 사항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형평사 경북지사는 경북 예천, 대구와 달성 하빈과 현풍 등에서 발생한 반형평운동을 겪으면서 형평운동의 강화에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대구의 형평운동은 1930년대 접어들어 전국적 양상과 마찬가지로 쇠퇴 국면을 보였다. 더욱이 1935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 이후 조선형평총본부가 제13회 전국대회를 계기로 친일단체 대동사(大同社)로 전환한 뒤 대구의 형평사 경북지사도 대동사로 전환되었다. 그에 따라 대구의 형평운동은 전국적 양상과 마찬가지로 쇠퇴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대중운동의 역사적 의의]

대구의 대중운동은 청년운동, 노동·농민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등 부문 운동의 성격을 가진 채 일제 식민지배 아래에서 대중들의 경제·사회적 이해를 옹호하는 활동을 벌였다. 아울러 대구의 대중운동은 식민지 대중의 인권과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서의 성격과 의미도 함께 갖고 있었다. 대구의 대중운동은 부문 운동의 상호 연관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펼치는 가운데 신간회 운동을 지지하였고, 신간회 대구지회의 운영에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대구의 대중운동은 1930년대 대구와 경북 지역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대구의 대중운동은 대구와 경북을 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기반이자 광복 후 근대 통일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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