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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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玄風郡邑誌 |
영어공식명칭 | Hyeonpung-gun Eupji |
이칭/별칭 | 경상북도현풍군읍지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류명환 |
[정의]
1899년 간행된 경상북도 현풍군의 읍지.
[편찬/간행 경위]
『현풍군읍지(玄風郡邑誌)』는 1899년(광무 3) 1책으로 간행된 현풍군의 읍지이며,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현풍군읍지』는 책 크기, 종이 재질, 판식 등 형태 사항이 1899년에 편찬된 다른 읍지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1899년 읍지상송령에 따라 제작된 읍지로 보인다.
[형태/서지]
『현풍군읍지』는 1책 30장의 필사본이다. 표제는 ‘경상북도현풍군읍지(慶尙北道玄風郡邑誌)’이며, 책머리에는 현풍군의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내제는 ‘현풍군읍지’이다. 크기는 세로 37.5㎝, 가로 25.3㎝이다. 10행에 18자로 배열되어 있다.
[구성/내용]
『현풍군읍지』는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관직(官職), 성씨(姓氏), 산천(山川), 풍속(風俗), 방리(坊里), 호구(戶口), 전부(田賦), 군액(軍額), 성지(城池), 임수(林藪), 창고(倉庫), 군기(軍器), 관애(關阨), 진보(鎭堡), 산성(山城), 봉수(烽燧), 학교(學校), 단묘(壇廟), 능묘(陵墓), 불우(佛宇), 궁실(宮室), 누정(樓亭), 도로(道路), 교량(橋梁), 제언(堤堰), 장시(場市), 역원(驛院), 도서(島嶼), 형승(形勝), 고적(古蹟), 토산(土産), 진공(進貢), 봉름(俸廩), 환적(宦蹟), 과거(科擧), 인물(人物), 여사(女史), 제영(題詠) 항목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성지, 임수, 관애, 진보, 도서, 목장 항목은 해당사항이 없어 ‘무(無)’라고 기록되어 있다.
건치연혁 조에는 1896년 현풍군을 설치한 사실까지 수록하였고, 관직 조에는 현감(縣監)에서 군수(郡守)로 바뀐 것과 군수 이하 관속 내역을 기재하였다. 산천 조에는 비슬산(琵瑟山)을 비롯하여 대니산(戴尼山), 차천(車川) 등 위치가 실려 있고, 풍속 조에는 김시습이 “현풍의 덕화가 융성하네[玄風德化隆]”라고 읊은 시를 인용하였다.
방리 조에는 현내면(縣內面), 동부면(東部面), 유가면(瑜伽面), 우만면(亏萬面), 말역면(末亦面), 묘동면(妙洞面), 구지산면(求智山面), 왕지면(旺旨面), 답곡면(畓谷面), 오설면(烏舌面), 산전면(山田面), 마산면(馬山面), 모로촌면(毛老村面), 진촌면(津村面), 논공면(論工面), 걸산면(乬山面), 서부면(西部面) 등 17개 면의 위치와 관문(官門)에서의 거리를 부기하였다.
호구 조에는 1831년 신묘식 원호(元戶) 3,447호와 인구 1만 3393명[남자 6,756명, 여자 6,637명], 1899년 기해년 호적 원호 2,005호와 인구 9,861명[남자 5,799명, 여자 4,062명]을 수록하였다. 전부 조에는 1898년 원장부(元帳付) 전답이 2,123결 6부 4속, 도합 결전(結錢)이 6만 3691냥 9전 2푼인데, 사등군(四等郡)에 해당하는 현풍군의 경비 1만 770냥을 제외하고 탁지부(度支部)에 실제로 5만 2921냥 9전 2푼을 납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학교 조에는 향교와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으며, 예연서원(禮淵書院)·송담서원(松潭書院)·이양서원(尼陽書院)은 없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장시 조에는 읍내시(邑內市)와 차천시(車川市), 형승 조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반송(盤松)·관수대(觀水臺), 고적 조에는 포산(苞山)·봉산(鳳山)·쌍계(雙溪) 등을 수록하였다.
환적 조에는 감무(監務)와 현감(縣監) 등 조선시대 역대 지방관의 이름과 아울러 도임·이임 연도의 간지를 적었는데, 감무 전평원(田平遠)부터 1896년 도임한 홍필주(洪弼周)까지 134명이 적혀 있다. 과거 조에는 곽원진(郭元振)부터 이승곤(李升坤)까지 급제자 28명의 등제한 연도의 간지와 역임한 최고 관직명을 부기하였고, 인물 조에는 곽부(郭郛)부터 박경원(朴景源)까지 고려 및 조선시대 인물 233명을 수록하였는데, 현풍을 본관으로 하는 곽씨(郭氏)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여사 조에는 효녀와 열녀를 기록하였다.
[의의와 평가]
『현풍군읍지』는 대체로 1871년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실려 있는 「현풍현읍지」를 바탕으로 그 이후의 변동 사항을 추가로 증보하였다. 특히 전부·군액·군기 항목의 기록이 상세하고, 환적·과거·인물·여사 등 인물 관련 항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현풍군읍지』는 19세기 후반 현풍군의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