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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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居正- 大丘十詠 |
영어공식명칭 | Seogeojeong's Daegusibyeong |
이칭/별칭 | 서거정의 대구십경,서거정의 달성십경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영권 |
[정의]
서거정이 15세기 대구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칠언절구 한시 10수로 지은 연작시.
[개설]
서거정[1420~1488년]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四佳) 또는 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아버지인 안주목사 서미성과 세도가 문충공 권근의 딸인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서 2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나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후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관료이자 대문장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관계로 막강한 세도가인 외가와 자형인 최항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탁월한 문장력과 인생관이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서거정이 나이 25세 때인 1444년에 문과에 급제할 당시 넷째 자형인 최항은 대제학의 직위에 있었다.
[내용]
1453년에 발생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서거정 생애 최대의 사건이었다. 서거정은 충절을 지키려는 사육신과 생육신과는 달리 계유정난의 주역인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 권람, 최항 등의 편에 서게 되었다. 정난의 주역인 수양대군은 반대파인 친동생 안평대군 등을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자 서거정 역시 세조 및 계유정난 공신들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 등장하게 되었다. 1465년에 예문관제학, 1466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었고,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자헌대부 행동지중추부사로 부임하였다. 1467년에 형조판서로 지성균관사와 예문관대제학을 겸직하였고, 1467년 겨울에는 공조판서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예문관 대제학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3년간 예문관 대제학 직을 유지하였다. 주요 관찬서도 서거정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나이 50세 때인 1469년 『경국대전』 발간을 비롯하여 『동인시화』, 『삼국사절요』, 『태평한화골계전』, 『동문선』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471년에 ‘순성명량좌리공신’의 호가 내려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서거정은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누렸다. 서울 남산 아래의 집 한 채와 근교에 여러 채의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남산 아래 서거정의 집에는 정정정(亭亭亭) 또는 정우당(淨友堂)이라는 정자와 동산 그리고 채소밭이 함께 있어 서거정의 시문 창작활동에 큰 토대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구십영」과 같은 연작시도 많이 남겼다. 「대구십영」은 서거정의 고향인 대구에 대한 애정을 한시로 표현한 것으로 15세기 당시 대구의 풍광을 잘 표현하고 있어 대구 지역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서거정은 「대구십영」에서 수려한 풍광은 물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조차도 대구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대구십영」은 칠언절구 한시 10수로 구성된다. 제1영은 금호범주(琴湖泛舟)[금호강 뱃놀이], 제2영은 입암조어(笠巖釣魚)[입암에서 고기를 낚으며], 제3영은 귀수춘운(龜峀春雲)[연귀산의 봄구름], 제4영은 학루명월(鶴樓明月)[금학루에서 바라보는 한가위 밝은 보름달], 제5영은 남소하화(南沼荷花)[남소에 피어난 연꽃], 제6영은 북벽향림(北壁香林)[향산의 측백나무 숲], 제7영은 동사심승(桐寺尋僧)[동화사를 찾아가는 승려], 제8영은 노원송객(櫓院送客)[노원에서 그대를 보내며], 제9영은 공령적설(公嶺積雪)[팔공산에 쌓인 눈], 제10영은 침산만조(砧山晩照)[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