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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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隍祠 |
이칭/별칭 | 성황단,서낭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조선 전기 대구 지역에서 성황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운 서낭당.
[개설]
성황사(城隍祠)는 고려시대부터 지배층의 종교적 기구의 하나로 존재하여 왔으며, 조선 초부터는 전국 모든 고을에 하나씩의 성황사를 두었다. 현풍현의 성황사는 비슬산에 있었는데, 정성대왕(靜聖大王)의 신(神)이 장마나 가뭄, 역질이 있을 때에 기도하면 응답이 있으므로 제사 지내려는 자가 몰려들었다. 제사 때마다 모인 종이와 베[면포]가 너무나 많아 활인서(活人署)에 보내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6년경(태종 6) 조선 정부는 국가의 제사 의례를 정비하면서 각 고을에 사직단, 문묘, 성황사, 여단을 설치하게 하였다. 성황사는 조선시대 후기가 되면 성황단(城隍壇)으로 바뀐 경우들이 많으며, 고을 수령이 성황 제사를 주관하지 않고, 오히려 지방 향리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제사를 주도하면서 민간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건립 경위]
성황사는 고려시대 지방 세력들이 자신들의 시조나 토착신을 고을 수호신으로 모시면서부터 출현하였다.
[위치]
조선 초에는 대구군이나 현풍현 모두 ‘성황사’라 하였으며, 대구군은 관아 동쪽에, 현풍현은 비슬산에 있었다. 조선 후기 대구부는 관아 남쪽 2리 연구산에 성황단이 있었으며, 현풍현은 비슬산의 성황사를 없애고, 관아 남쪽 2리에 성황단을 세웠다. 칠곡부는 관아 서쪽 1리에 성황사를 두었으나, 1819년 관아를 지금의 대구 북구 칠곡 지역으로 옮기면서 관아 북쪽 옥녀봉(玉女峰)에 성황단을 설치하였다.
[현황]
조선시대 후기에는 점차 원래의 자리 이외에도 성황단[성황당, 서낭당]을 세웠다.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의 장등산과 천왕당, 서구 내당동의 당산(堂山), 상리동의 성황당, 수성구 만촌동의 쉬일목, 매호동의 조산(造山), 동구 송정동의 당정마을 등은 성황단이 있던 마을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말 성황은 고을 수호신에서 점차 마을 수호신으로 변모하면서 각 고을과 마을에 전해지는 민간신앙과 무속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