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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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制憲議會 選擧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8년 5월 10일 대구에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하여 실시된 최초의 근대 선거.
[역사적 배경]
한반도의 완전한 독립, 통일 근대 국민 국가의 건설을 이루기 위한 국제적 절차로서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한반도 문제가 미국에 의하여 유엔[UN]으로 이관된 뒤 단독선거[단선]에 의한 단독정부[단정] 수립이 가시화되었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총회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선거 실시안이 통과되었고, 선거 날짜는 1948년 5월 10일로 결정되었다.
[경과]
1948년 5월 10일 대구에서 치러진 대구 제헌의회 선거(大邱制憲議會選擧)는 갑, 을, 병 등 3개 선거구에서 각 1명씩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갑구 6명, 을구 3명, 병구 3명 등 모두 12명의 후보가 선거에 나섰는데 무소속이 6명, 한국민주당이 4명, 대동청년단이 1명, 여자국민당이 1명이었다. 대구 제헌의회 선거는 ‘5·10선거야말로 민국(民國) 수립을 위한 축제이다!’라는 우익의 반응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동시 총선거가 아니면 결사반대!’라는 남북협상파[중간파]와 좌익의 반응으로 양분되었다.
대구 지역 좌익 세력은 1948년 2월 7일 ‘남한 단선을 꾀하는 유엔한국위원회 반대, 단정 단선 결사반대, 미·소 양군 즉시 철수’ 등을 내세우고, 이른바 2·7구국투쟁을 벌였다.
한국민주당 경북지부는 1948년 2월 16일 조양회관에서 선거촉진대책협의회 결성 준비 회담을 열었고, 한국민주당 대구지부는 1948년 3·1절 행사에서 ‘자주독립은 우리 실력으로’를 주장하며 단독정부 수립 반대에 나섰다.
1948년 3월 3일 행정명령 제14호에 따라 국회선거위원회가 조직되었고, 3월 13일 선거공보 제1호가 공포되었다. 전국 선거구 수는 대구 3곳을 포함하여 경상북도 28곳 등 200개였다. 1948년 4월 4일 윌리엄 딘 군정장관이 대구의 선거 사무 현황을 시찰하였다. 이어 4월 5일에는 프랑스, 중국, 엘살바도로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대구의 각 선거사무소를 시찰하고 등록 유권자 수, 선거방해 유무, 시민의 선거 태도 등을 살펴보았다. 1948년 4월 16일 국회의원 입후보 등록이 마감되었다. 1946년 4월 남북협상파 등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은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연석회의에 집중하였다. 1948년 5월 들어 좌익 세력은 학교와 시내 곳곳에서 ‘단선 반대’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결과]
대구 제헌의회 선거 결과는 갑구에 한국민주당의 최윤동(崔允東), 을구에 한국민주당의 서상일(徐相日), 병구에 한국민주당의 백남채(白南採)가 당선되었다. 대구는 한국민주당이 3석 모두를 차지하였다. 서상일은 민생안전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당선 인사를 하고 최윤동, 백남채 등과 함께 서울로 향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 제헌의회 선거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근대적 선거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는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