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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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相日 |
영어공식명칭 | Seo Sangil |
이칭/별칭 | 동암(東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서상일(徐相日)[1886~1962]은 개항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몽운동, 비밀결사, 언론활동, 경제활동, 자치운동, 한국민주당 활동, 제헌국회 의원, 야당통합운동, 진보당과 사회대중당 및 혁신정당 활동 등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다양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가계]
서상일은 1886년 7월 9일 대구에서 서봉기(徐鳳基)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동암(東菴)이다.
[활동 사항]
서상일은 1909년 대구에서 ‘조선인 청년의 교육과 실업의 장려’를 표방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와 서울의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대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3년 대구의 안일암(安逸庵)에서 ‘한일병합’으로 해산되었던 달성친목회를 재건하였으며,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태궁상회(太弓商會)[태궁상점]를 설립하였다. 태궁상회는 안희제(安熙濟)가 경영하던 백산상회(白山商會)의 대구 지역 연락사무소 역할도 맡았다. 달성친목회 재건 이후 서상일은 상업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형 서상규(徐相奎)를 방문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만주 지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1916년 서상일은 대구권총사건[일명 애국단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대구권총사건은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1919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포문과 강령 각 10매를 문상직(文相直)으로부터 전달받아 대구 지역에 배포하였으며, 독립의군부의 자금 모집원으로 파견된 대구 출신 정운해(鄭雲海)를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에게 연결하여 주었다. 이 때문에 서상일은 내란죄로 투옥되었고, 1920년 초에 석방되었다. 이 무렵 일본에 유학 중이던 동생 서상한이 영친왕 이은(李垠)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검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서상일은 동생의 재판을 돕기 위하여 일본 도쿄[東京]에 한동안 머물렀다.
1921년부터 서상일은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대구곡물신탁주식회사 이사와 조선인산업대회 위원을 지냈고, 1922년 대구운송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고 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서병조·서창규 등과 함께 조양무진회사(朝陽無盡會社)를 설립하였다.
이에 앞서 서상일은 1920년 대구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였는데, 1922년 7월 대구청년회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에는 대구 지역 정치세력의 활동 공간 역할을 한 조양회관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923년 사립 교남학교(嶠南學敎)[현 대륜중고등학교]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7월 무렵에는 대구구락부 결성을 주도하고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였다. 1925년에는 정운해·서만달 등과 함께 농촌 개량과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대구농촌사를 설립하였다. 이어 1927년 11월에는 일본인 중심의 대구상업회의소에 맞서 한국인 중소 상공업자의 발달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구상공협회를 설립하였다. 1937년 부동산 매매 및 알선을 주업으로 하는 경북상공주식회사의 이사가 되었고, 1942년에는 경상북도양곡주식회사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서상일은 전시체제기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을 지내며 친일단체와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서상일은 경북 지역 우익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경북치안유지회 결성을 주도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얼마 후 경북치안유지회는 좌익의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와 통합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로 바뀌었다. 이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8인의 총무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미군정청 경제고문·비상국민회의 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대구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장 겸 산업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2년 6월 이승만 저격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구형받았다.
서상일은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이승만 독재 반대와 야당 통합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때 서상일은 민주대동파에 가담하여 조봉암의 야당 통합운동 참여를 찬성하였고, 1955년 9월 1일 진보당(가칭)추진위원회가 구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총무에 선임되었다.
서상일은 제3대 정부통령 선거 이후 진보당과 결별하고, 1957년 10월 15일 민주혁신당을 결성하여 간사장으로 활동하였고, 1960년 4·19혁명 이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대구 을구에 출마하여 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10월 민주혁신당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사회당을 결성하였으며, 1961년 1월 비진보당 계열과 연합하여 사회민주주의 우파를 표방한 통일사회당을 결성하고 정치위원이 되었다. 통일사회당은 7·29선거 이후 진보당계의 사회대중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맞서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을 구성하고, ‘선 영세중립화 후 남북협상’이라는 남북통일 방안을 내놓았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서상일은 이른바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군사혁명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서상일은 1962년 2월 14일에 열린 결심 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4월 18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서상일은 1931년 자치운동을 정당화한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에 관한 사견」을 작성하여 타협적인 자치운동만이 약소민족인 조선족이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1951년에는 『현하의 국난타개책』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1921년 「조선청년회의 이상과 사업」, 1957년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이 길」, 1959년 「헌정 11년」 등의 여러 논설을 남겼다.
[묘소]
서상일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애국선열·광복군 합동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일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