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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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俄求靑年同盟 |
이칭/별칭 | 아구동맹,아구동맹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25년 1월 18일 - 아구동맹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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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25년 7월경 - 아구동맹에서 아구청년동맹으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대구부 덕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 |
성격 | 청년운동 단체 |
설립자 | 최세기|이상승|박상렬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개설]
1925년 1월 18일 대구부 덕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대중 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아구청년동맹(俄求靑年同盟)은 ‘아구동맹회’라고도 한다. 아구청년동맹은 대구의 사회운동 단체와 더불어 대중을 옹호하는 사회운동을 펼쳤다.
[설립 목적]
대중 해방과 대중의 교양 함양을 목표로 내세우고 결성된 아구청년동맹은 평등 의식과 신문화 건설을 지향하였다.
[변천]
아구청년동맹은 결성 당시에는 단체 명칭을 아구동맹으로 하였으나 1925년 7월 무렵 ‘아구청년동맹’으로 확대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아구청년동맹은 1925년 1월 18일 창립총회를 열고, 선언과 강령을 채택하였다. 선언은 “아구동맹회를 조직하노라, 이에 나아가는 뜻 가진 동지여, 오라! 아구(俄求)를 부르짖는 그곳으로“라는 내용이었다. 아구청년동맹의 발기 위원은 최세기, 이상승, 박상렬, 이형숙, 김훈 등 14명이었다.
아구청년동맹은 1925년 8월 ‘예천 형평사 사건’이 발생하자 대구청년회, 대구노동공제회, 철성단, 용진단, 혁조단 등 대구의 16개 사회운동 단체와 연합하여 ‘예천사건대책협의회’를 만들어 형평운동을 지지하고 반형평운동을 제재하는 활동을 벌였다. 아구청년동맹은 1925년 10월 25일 대구청년회관에서 신암청년회, 반월청년회, 효목청년회, 가창청년회 등과 함께 대구청년회가 발의한 달성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달성청년연맹의 집행위원에는 아구청년동맹의 박광세(朴光世)와 박무(朴茂) 등이 포함되었다.
아구청년동맹은 1926년 4월부터 대구 지역 사회운동단체들과 사회운동단체 합동 간친회를 여는 등 사회운동단체의 합동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아구청년동맹은 1926년 9월 대구청년동맹의 발의로 대구청년회·대구무산청년회 등과 함께 ‘4단체 연합 청년데이 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 관헌의 금지로 무산되었다. 아구청년동맹은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의 신운동 방침이 제시되자 대구청년동맹, 대구무산청년회, 대구청년회 등과 함께 전격적으로 ‘합동전권위원회’를 구성하고, 1927년 7월 24일 대구청년단체합동총회를 통하여 단일 단체인 대구청년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대구 지역 청년운동의 통일을 꾀하였다.
[의의와 평가]
아구청년동맹은 1925년 대중 해방과 대중의 교양 함양을 목표로 창립된 이후 대구·경상북도를 비롯한 전국 차원의 청년운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