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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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虛無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윤우열이 조직한 무력 투쟁 독립운동 단체.
[개설]
윤우열(尹又烈)[1904~1927]은 대구교풍회 회장, 대구자제단 발기인, 국민협회 대구지부 지부장 등 친일 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한 윤필오의 아들이다. 윤우열은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속성과를 다닌 유학파였다. 유학 후 서울계의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하여 활동한 윤우열은 서울과 대구에서 청년운동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펼쳤다.
윤우열은 서울에서는 고려공산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활동을 펼쳤고, 대구와 경상북도에서는 대구제4청년회와 철성단, 사상단체 신사상회, 경북사회운동자동맹 등에서 활동을 펼치며 사회운동을 선도하였다.
[설립 목적]
대구와 서울에서 사회운동을 맹렬하게 펼치던 윤우열은 당시의 사회운동 방식으로는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폭파·방화·총살 등의 무력 투쟁 방법으로 조선 혁명을 이루고자 1925년 11월 허무당(虛無黨)을 조직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윤우열은 1925년 11월 대구에서 무력투쟁을 통하여 조선 혁명을 이룰 조직의 명칭을 ‘허무당’으로 정하였다. 이후 대구부 명치정(明治町) 2정목 1번지[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1-1]에 있는 자택에서 ‘허무당선언서’ 작성을 시작하여 12월 초순 마무리한 뒤 서울의 한성강습원과 조선청년총동맹 사무실에서 허무당선언서를 인쇄하였다. 윤우열은 광화문우편국[현 광화문우체국] 소인이 찍힌 허무당선언서를 조선의 각 신문사, 통신사, 은행 등과 일본의 정당, 잡지사 등에 발송하였다.
윤우열은 허무당선언서에서 “합법적으로 현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을 믿는 자 있다면 그것은 저능아이다”라고 단정하고, “혁명의 봉화를 점하자, 파괴의 의검을 빼라, 의분 있고 혈기 있는 자는 분기할 시기는 왔다”며 격렬한 혁명과 투쟁을 강조하고 일제에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뜻을 밝혔다. 또한 허무당에 반대하는 자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하고 민중의 적은 폭파와 방화, 총살로 응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허무당선언서가 발송된 사실을 알게 된 일제 관헌은 허무당선언서의 신문 게재를 금지하고, 경기도 경찰부와 서울 시내 각 경찰서에서 수사를 시작하였다. 1926년 1월 8일경 일제 관헌은 허무당선언서의 작성과 배포가 윤우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관련자들은 속속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 시작하였다.
윤우열은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지자 대구로 피할 생각이었으나 실행하지 못한 채 1926년 1월 12일 서울 소격동에서 종로경찰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우열은 1926년 5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윤우열은 1년 2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감형되어 1927년 2월 출옥하였으나 출옥 4개월 만에 2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현황]
대한민국 정부는 윤우열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우열이 허무당선언서를 작성하였던 윤우열의 집은 멸실되었으나 윤우열의 집터[중구 계산동2가 1-1]는 국내 항일운동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허무당은 1920년대 조선 사회운동의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윤우열이 폭력적 수단으로 조선 혁명을 이루고자 하였던 독립운동 단체였으나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적 현실 인식, 혁명 주체와 대상, 대중성 확보 등에 대하여서는 명확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전망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