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15
한자 杜師忠 神道碑
영어공식명칭 Dusachung Sindobi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 715-1]|달구벌대로525길 14-23[만촌동 71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02년 3월연표보기 - 두사충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모명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만촌동 715-1]지도보기
현 소재지 두사충 묘 -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3[만촌동 716]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대석|비신|개석
관련 인물 두사충|이순신|구경보|이인수
재질 화강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118㎝|55㎝|30㎝
소유자 두릉두씨 문중
관리자 두릉두씨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조선 후기 명나라 귀화인 두사충의 신도비.

[개설]

두사충 신도비(杜師忠神道碑)두사충[?~?]의 후손 두경보(杜敬甫)[1775~1852]가 1802년에 건립하였다.

[건립 경위]

두사충은 원래 명나라 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지원군(支援軍)으로 두 차례 조선에 들어왔다. 첫 번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에 이여송(李如松)의 참모이자 수륙지획주사(水陸持畫主事)로 들어왔다. 수륙지획주사는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땅의 기운을 살펴 군대의 진지를 펼치는 임무를 하는 직위이다. 두 번째는 1598년(선조 31)에 매부(妹夫)인 수군도독(水兵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비장(裨將)으로 들어왔다. 이때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을 만나 교유하였다. 두사충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대구 지역에 정착하였다.

두사충의 6대손 두경보는 1800년(정조 24) 봄에 무과에 응시할 때 이순신 장군의 7대손 삼도통제사 이인수(李仁秀)를 알게 되었다. 두경보는 이인수가 지은 비문으로 1802년 3월에 두사충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위치]

두사충 신도비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715-1에 있는 모명재(慕明齋)만촌동 716에 있는 두사충 묘소에 각각 서 있다.

[형태]

묘 옆에 있는 두사충 신도비에는 대석(臺石), 비신(碑身), 개석(蓋石)이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높이 118㎝, 폭 55㎝, 두께 30㎝ 정도이다. 모명재 경내에 세운 것은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가 있다.

[금석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공(公)의 성(姓)은 두씨(杜氏)이고 휘(諱)는 사충(思忠)이다. 명나라 사람이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황제의 명으로 장차 왜적의 침략을 토벌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공은 당시에 명나라 관직인 복야(僕射)였는데 매부 도독(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와서 호남과 영남에서 나의 7대조 충무공[이순신]과 함께 전투를 하였다. 충무공이 한번 만나보고서 옛 친구처럼 대하였는데 마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자산(子産)에게 한 것과 같았다. 대개 충무공의 남긴 글에서 시를 보고 자손들이 장엄하게 외웠으나, 조선에서 늙고 동국에 묻혔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경신년[1800년(정조 24)] 봄에 과거를 보러 온 두경보를 만나 공의 6세손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공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살고 유적지가 달구벌에 있고 무덤이 형제봉 아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갑신년 이후 인간 세상이 어찌 되었는지. 작은 동토(東土)를 잊지 못하여 돌아가지 않고 남은 사람은 어찌 노중련(魯仲連)의 도해(蹈海)의 뜻이 아니겠는가? 명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의 기록에 보이는 사람으로 성산(星山)의 시씨(施氏)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니, 복야공의 자손이 6세에 이르기까지 어찌 알려지지 아니하였는가? 약포(藥圃) 정상공 탁(鄭相公琢), 서애(西崖) 류상공(柳相公成龍)이 연명한 동유록(同遊錄)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최감사 현(崔盟司晛), 이승지 언영(李承旨彦英) 또한 동국에 알려진 분들이다. 그 자손들이 거듭 선의(先誼)를 말하고 있으니 또한 가히 명성이 있었다. 공이 풍수에 뛰어나 도독(都督) 진(陳) 상공(相公)의 군대 주둔지에 이로움을 잃지 아니하였고, 또 나의 선조의 묘 터도 잡아 주었는데 세상에서 길지(吉地)라고 칭하니 또한 지리(地理)에 일단(一端)을 이룬 것을 징험할 수 있다. 내가 바야흐로 3도의 통제사인데 공의 묘소 또한 나의 관할 내에 있으니 비석에 쓸 한 말이 없을 수 없다. 명을 합니다./ 이곳은 명나라 복야공(僕射公)의 유택이니, 길이 나무꾼과 목동들이 침범하지 말지어다./ 숭정기원후 3임술(壬戌)[1802년] 3월 초3일 가선대부 행 삼도통제사 이인수 삼가 짓다[公姓杜 諱師忠 皇明人也. 萬曆壬辰, 皇帝命, 將討島夷之猖獗,我東國者. 公時以 皇朝僕射, 共妺婿陳都督璘, 在湖嶺軍, 與我七代祖忠武公, 一見如舊職, 如廷陵之扵子産也. 槪見扵忠武公遺牒, 而子孫莊誦之, 猶未知老于東國, 葬于東國. 庚申春, 邂逅, 赴試人杜敬甫, 則扵公爲六世孫, 始知公有后扵東國, 而遺址達句城中幽宅兄弟峯下. 鳴乎 甲申以後, 人間何世瑣尾, 東土滔滔, 不歸者, 豈非蹈海之義歟. 明人之見錄於 本朝者, 至若星山之施, 無遺矣. 以僕射公而六世無聞何哉. 藥圃鄭相公琢, 西崖柳相公成龍, 聯名同遊錄尙在, 崔盟司晛, 李承旨産英, 亦吾東之聞家也. 其子孫娓娓, 設先誼, 亦不可謂無聞也. 公邃扵靑鳥學, 在都督陳相軍屯營不失其利, 又卜吾先兆世稱其吉, 亦徵其達理之一端也. 余方統制三路, 公之墓所亦在關內, 不可無語扵一片石,遂爲之銘曰 是惟 皇朝僕射之宅. 永世母俾樵牧.

崇禎紀元后 三壬戍三月上浣 嘉善大夫 行三道統制使 李仁秀 謹撰].”

[현황]

두사충 신도비는 재실인 모명재와 두사충 묘소, 이렇게 두 곳에 세워져 있으며 두릉두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였으나 이후의 행적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니, 대구 지역 유학자의 문집에도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사충 신도비에 새겨진 비문을 통하여 두사충과 이순신의 친교 관계 등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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